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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y 18. 2022

짜인 공간에서 똑같이 자라나는 우리

<어디서 살 것인가>

우리는 '밖'보다는 '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밖'에 있을 때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다. 이동할 때, 바람을 쐴 때, 야외 운동을 즐길 때 등. 나머지의 경우에는 모두 '안'에서 생활한다. 일, 공부, 식사, 잠 등 우리의 주요 활동은 대부분 이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이 동굴에서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안'과 '밖'의 구분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안'에서 느끼는 안전함과 편안함 속에서 우리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한 지금이다.


그렇다면 어떤 '안'에서 지내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을까? 질문이 잘못되었다. 좋은 것은 모두 각각 다를 테니. 살아가면서 우리가 지내고 싶은 장소를 골라서 그 안에서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해보자. 우리 삶의 흐름을.


유치원, 학교, 대학교와 같은 배움의 공간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직장을 고를 때는 어떤가? 어떤 건물에서 지낼 것인지는 고려사항이 아니다. 크게 다르지도 않다. 다 거기서 거기다. 인생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와 학교 건물에 대해서 우리의 선택권이 없다. 나머지 절반을 보내는 집은 다를까? 평수나 구조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비슷비슷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투자, 투기의 목적으로 집을 바라보며 고를 수는 있겠지만 삶의 공간으로서 고려되는 상황은 아니다. (오죽하면 '녹슨 물로 살면서 버텨야 큰 부자가 된다'는 말도 있겠는가.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재개발을 기대하는 웃픈 모습을 풍자하며) 대부분의 삶에서 머무는 건물의 선택이 중요할 것 같지만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 개개인이 취향에 따라 성향에 따라 지내고 싶은 곳을 고를 수가 없다.


환경은 분명히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주변 사회, 주변 사람만큼이나 지내는 장소, 즉 건축물도 영향을 준다. 지금 우리처럼 다 비슷하게 획일화된 공간에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크게 벗어나지 않고 다 고만고만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지. 이 사회가 바라는 것이 적당히 평준화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아닐 거다. 어디서나 격동하는 변화의 시대에 맞게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을 원한다고 부르짖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 다 똑같이 생긴 네모난 장소에서 배우고 일하며 살고 있다. 개인의 특성이나 취향에 맞는 곳을 고를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지 정해진 틀에 맞춰 끼워 넣고 있다. 그렇게 똑같은 틀에 맞춰진 사람이 건물 밖에 나와 돌아다니며 살아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쩌다 우연히 다른 모양의 틀에서 나온 이를 보면 이해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왜 너는 특이하냐며, 유별나게 군다며' 정해진 틀에 맞추라고 강요한다.


사실 난 이런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정형화된 사람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 상식적이라는 것이 진리라고 믿었으니까. 내가 지내 온, 그리고 지내고 있는 건물들이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모두 이 책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가장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부분은 이제 막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선택권이 없다. 어른들이 지어놓은 건물에서 귀중한 성장기를 자란다. 충격적인 부분은 '학교'가 가장 비슷한 곳이 '교도소와 군대'라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키워줘야 할 곳이 규제, 억압의 대명사인 곳과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건물 모양과 그 안에서의 생활 방식이 창의력을 길러 주기는 커녕 찍어 누르기 딱 좋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나도 그곳에서 십 년 넘는 시간을 보냈기에 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단순화된 사고방식의 핑계를 이제야 찾아서. 또 하나는 우리 아이도 그곳에서 똑같이 지내고 말 것이라는 피하고 싶은 미래 때문에. 밝고 맑게 그리고 개성 있게 존중받으며 살아가길 바라는 우리 아이가 대부분의 시간을 네모 반듯하기만 한 곳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자라나야 할 것인가? 이 책이 준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질문을 받아 든 이상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깊어가는 고민을 해결하고 싶다. 알고도 그대로 당할 수는 없다. 더 이상 짜인 틀에 갇혀 살고 싶지 않다. 그 틀에 내 아이를 더더욱 넣고 싶지는 않다. 많은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갖게 된다면 변할 것으로 믿는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읽고 남는 건 받은 질문과 했던 고민뿐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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