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Oct 05. 2022

없어도 되는 직업

코치, 멘토

그날도 역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지적 말고는 영양가 있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니 뭐든 뾰족한 수를 알려주면 좋겠는데 결정적일 땐 말을 아꼈다. 완벽한 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당신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매뉴얼에 있는 체크리스트 점검을 벗어나질 못했다. 계속되는 조언 같은 설교에 지쳐 참다못해 조용히 손을 들고 말했다. "상무님, 저희도 그 부분이 참 답답합니다. 혹시 해결할 만한 좋은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겠어요? 대략적인 방향이나 아이디어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어마어마한 가관이었다. "전 여기 한발 물러나 당신들이 놓치는 부분을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낼 거면 제가 거기서 직접 하겠죠." 이후부터 그에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회사 앞 슈퍼마켓 사장님을 모셔오는 게 훨씬 낫겠다는 아쉬움으로 입맛만 쩍쩍 다셨다.


신규 사업을 추진하던 사내 스타트업 시절에 만난 자칭 타칭 공식 멘토와의 쌉쌀한 기억이다. 외부에서 다양한 경험을 두루두루 겪은 덕에 치명적인 핵심을 짚어줄 거라며 어렵게 초빙해왔다고 들었다. 아주 잠깐 신선한 거품에 놀랐지만, 곧 몽땅 빠지고 나선 실망투성이로 변했다. 보아하니 뭐 하나 직접 해본 것 없이, 이런 식으로 이래라저래라 어디 가져다 놓아도 옳은 말만 하며 커리어를 이어온 모양이었다. 알맹이 없는 화려한 빈껍데기를 대하고 있자니 절로 동네 가게 주인이 위대하게 다가왔다. 규모는 작아도 자기 손으로 사업을 해본 경험은 책과 인터넷으로 쌓은 지식과는 비할 게 아니니.


최악을 최초로 접하면  뒤는 보지도 않고 치를 떨게 된다. 멘토링이니 코칭이니 컨설팅이니 하는 용어만 봐도 학을 떼었다.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수년을 보냈다. 우연히 고개를 잘못 돌렸는데, 밑천이 드러나 없어졌어야  세계가 굉장히 커져 있었다. 본격 직업의 종류로서 자리 잡은 , 코치와 멘토라는 사람들이  디딜  없이 널려있다.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며 의혹이 생겨난다.  많은 사람이 모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 뭔가를 알려주고 이끌어 주려면 유의미한 경험이 있어야  텐데,  자리씩 했다면  아는 이름이 아무도 없을까. 좁은 식견의 내가 모른다 쳐도 이력은 남아있어야 하는데, 경력  줄이 다짜고짜 코치, 멘토라니 도대체 뭘까. 아예 가르칠 사람을 가르치며 본격 육성하는 기관 있다는데 이건  무슨 코미디일까.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찾아가 물어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제일 궁금하다. 점쟁이에게 미래를 묻는 것과는 다른 걸까.


더 이상 답답해지기 싫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자 널찍이 떨어져 있으니, 가르침을 향한 근원적 물음이 떠오른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게 아닐까. 먼저 받는 입장에서 보면 남의 말로써 변해야 하는 건데, 가까운 부모님 말씀부터 시작해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잔소리 듣고 고치는 게 아니던가. 타인의 의견에 병적인 거부감으로 시작하는 나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하면 자기 고집대로 살려는 게 우리라고 믿는다. 백번 양보해서 절박한 상황에 부닥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를 벌려 열었다고 하자. 주는 입장으로 향하면 가능성이 희박할 수밖에 없는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 그렇다. 해당 분야의 최고를 모셔와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걸 꺼내 보여도 완전히 적용할 순 없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성향, 능력, 의지, 감성 등 차이를 만드는 차이가 크다. 이것도 만 번 양보해서 둘이 쌍둥이라고 해도 여전히 간극이 크다. 어쩔 수 없는 외부 환경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공한 멘토의 라떼와 가여운 멘티의 지금은 다른 세계다.


남에게 배우기 싫어하는 이유를 극단과 과장으로 꾸며봤는데 전달이 되었나 모르겠다. 지식과 지혜를 전하고 터득하는 행위가 가치 없다고 하진 않겠다. 다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건 막고 싶다. 꼭 스승과 제자로서 높은 교단에서 낮은 책상을 향해 가르쳐야 할까. 먼저 경험하고 알게 된 걸 서로 나누는 동등한 입장이면 좋겠다. 거창한 강연이니 강의라는 칭호를 떼고 '배움 나눔' 정도면 자연스럽지 않을지. 둥그렇게 둘러앉아 같은 높이에서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국한된 이야기라 인정하며 전하는 분위기. 다 같이 고만고만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오래 겪어왔고 지금도 벌어지는 마치 위에서 하사하듯 던지는 폐해는 지속될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러고 있을까?


하는 일이 멘토링이나 코칭이 전부인 사람이다. 직업란에 멘토, 코치라고만 적어두었다면 백이면 백이다. 대상 영역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지 않다면 의심부터 하면 된다. 실제 사례지만 만들어낸 것처럼 예를 들어보겠다. 누군가 자신의 글을 쓰지 않고 책도 내지 못한  수년째 글쓰기,  쓰기 강사로서 작가 지망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쓰는 글은 오직 본인 유료 강의 홍보를 위해서다. 그것밖에  쓰는 건지, 그걸 제일  쓰는 건지, 그게 가장 돈이 돼서 그러는지는 다른 글을 쓰지 않아서 확실치 않다. 자랑스러운  하나의 저서이며  책이자 마지막 책이 황당무계하지만 글쓰기 책이다. 그런데도 본인이 대단한 전문성을 가졌다고 우기며 시도 때도 없이 수강 신청을 받겠다며 난리다. 무조건 피해야 한다. 진짜 능력자는 이럴 여유가 없다. 본업에 충실하느라 바쁘다. 듣고 싶은 사람이 매달려 요청해도 이루어질까 말까다. 진정한 멘토는 멘티를 찾아다니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움찔거릴 '사짜'들의 눈에 띄는 특징을 더 알아보자. 비법이니 비술이니 외치며 팔고 있다면 뻔하다. 몇 시간 완성이니 하루 완성이니 떠드는 것도 포함해서.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고 있어도 그 가격에 세상에 뿌릴 리도 없다. 혹시나 같은 것도 없고 역시나 뿐이다. 있어 보이게 포장해서 그럴듯하게 입을 터는 사람도 경계하자. 유명 셀럽 분위기가 난다면 조심하자. 알맹이가 있어도 멋지게 꺼내 보이긴 어렵지만, 비어있어도 화려하게 보이긴 쉬우니까. 내용 없는 말발에 속지 말자. 자기가 다 해봤고, 다 알고 있다는 식이면 돌아서자.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보나 마나다. 깊이 없이, 제대로 된 이해 없이, 현실적 통찰 없이 자기 말만 반복하면 말 다한 거다. 누굴 대상으로 하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앵무새처럼 준비된 강의안만 읽을 뿐이니까.


또한 그들은 절대 청출어람을 원하지 않는다. 선한 영향력이라는 번드르르한 표현으로 지식과 경험을 모두에게 나누어 이롭게 쓰이고 싶다는  공통 고정 멘트다. 말과 다르게 주머니 챙기는  먹고살기 힘드니 그렇다 치더라도, 진실로 배우는 자가 자신만큼 되길 바랄까? 내일부터 높은 강단에서 끌려내려 오고  배운 수강생이 당신 자리를 대체한다면 흐뭇하게 웃으며 바통을 넘길  있을는지. 그럴까  진짜 비밀(있지도 않겠지만) 숨겨두고 있는 거라면 좋은 땅과 아파트가 남았다고 연락하는 부동산과 뭐가 다를까. 정말 좋은  나눠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면 굳이 돈까지 내고 그들을 찾아갈 이유를 모르겠다.


부자연스러운 위아래 관계를 떠나 인생을 살펴보면 깨우침을 줬던 인물은  있었다. 멘토니 코치니 하는 거짓 명찰을 달지 않은 . 자기 일을 직접 해나가며 이루어 가는 사람만이 의미 있는  마디를   있었다. 묻지 않으면 먼저 나서서 알려주지 않았고, 의견을 물어도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저 본인의 경우일 뿐이라고 강조하며. 특이하게 내가 물었지만 내게 질문을  많이 . 자신의 한정된 답을 주기보단, 주체인 나에 대해 알아가도록 적절한 부분을 찾아 의문을 던졌다. 대화를 마치고 나면 전부 담지도 못할 충고를 끙끙대며 지고 가는 기분이 아닌 이유였다. 개운하고 후련하고 밝아졌다. 모른다는 말을 곁에 둔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모르는  모른다고 했고, 범주를 넘으면 무리하지 않고 멈췄다. 알면 알수록  모른다더니 그들이 그랬다. 제일 좋았던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아서였다. 순전히  몫으로 남겨두고 나만의 길을 존중했다. 다시 찾아가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다고 재잘대고 싶은 충동을 자제해야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이들의 필요성에 회의적이다. 결국 남는 건 자신 혼자이기 때문이다. 위인전에 등장하는 닮고 싶은 인물이 살아나 같은 집에 살면 우리가 저절로 위인이 될 수 있을까. 되살아난 망령과 같이 살지 않고도 위인이 되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남이 남을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건 한계가 있다. 딱 그 사람의 그릇만큼. 멘토와 멘티의 관계가 계속될수록 불가능에 수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스스로 깨우치고 행동하며 자신의 한계를 알아가고 극복하는 것만이 인간이 무언가를 해내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타인은 내가 가는 길에 없다. 있으면 좋을 수도 있지만, 없으면 안 되는 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남에게 기대려는 틈을 보이면 사기꾼의 먹이가 되기에 십상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명심하자.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얕다는 뜻이다. 돌고 돌아가더라도 혼자 가보는 길이 옳다고 믿는다. 제 갈 길은 그렇게 찾아진다.

이전 14화 기대와 최선을 숨기는 미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