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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23. 2022

힘들어 죽겠다는 이제 그만

사는 데는 힘이 든다

설마 사는 게 힘들지 않은 사람 있나? 내가 알기로는 없다. 어느 쪽을 둘러보든 무슨 소식을 듣든 죄다 힘든 이야기뿐이다. 경제가 힘들다, 사회가 힘들다, 회사가 힘들다, 공부하기 힘들다, 취업하기 힘들다, 돈 벌기 힘들다.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안 힘들다는 걸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자라면서, 학교 다니면서, 근무하면서 "아이고, 편하다."를 실수로라도 흘리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지금까지 대충 절반 살았다 치면 확률상 죽기 전에는 마주치지 못할 게 분명하다. 1리도 안 되는 타율의 무안타 타자가 홈런을 칠 리는 없으니까. 여태 없었다는 건 앞으로도 없다고 보는 게 속이 편하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계속 힘들다 끝나고 말 게 뻔하다.


힘이 들다. 어쩌면 당연한 소릴 공공연하게 뱉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려면 힘이 필요하니까. 앉든 서든 걷든 뛰든 먹든 싸든 뭘 하든지 힘을 쓴다. 심지어 잘 때도 숨 쉬고 혈액 순환하느라 힘이 든다. 죽은 듯이 잔다고 하지만, 진짜 죽으면 힘이 없어 깨지 못한다. 힘이 사라지면 죽어가는 거고, 더 이상 힘이 들지 않는 건 죽음부터다. 사는 게 힘든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티를 내며 표현하는 건 왜일까. 괴롭고 어렵고 고달프다고 외부에 알리면 좀 나아지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힘들다'를 입에 달고 사는 어린 내게 자주 말씀하셨다. "힘들다고 말해서 고통이 덜어지면 그렇게 하렴. 근데 아니라면 말할 힘을 나아지는 데 쓰는 게 낫지 않겠니?" 할 말을 없애버린 현명한 해결책에 지금도 무릎을 치는 걸 보면 적절한 추측은 아닌 것 같다.


혹시 안 힘들어 보이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걸까. 마치 직장 회의 시간에 새로운 일이 생겨 누군가 맡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하나같이 누가 더 힘드네 경쟁을 하듯이. 조금이라도 할 만하다는 티가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잡일이 뭉탱이로 몰려가니, 누구도 힘이 들지 않은 틈을 보이지 않는다. 인생길에서도 고단한 짐을 하나라도 덜 짊어지려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자세를 유지해야, 저 위에서 보고 있는 그분이 '쟤는 여유가 없으니 봐주자'며 넘어가는 관례가 있는 게 아닐지.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설명이 되려나. 우리도 주변에 죽상을 짓고 있는 친구는 괜히 건드리지 않고 피하곤 하니까. 더 힘들지 않으려면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썩소가 삐져나온다.


에브리바디 힘든 세상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기가 제일 힘들다. 군대 땡보직, 회사 꿀보직도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며 힘든 근거를 줄줄 읊는 형편이다. 어느 누굴 붙잡고 물어도 안 힘들다는 사람 찾기 어렵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건네는 안부로 자연스럽게 고통의 여부를 묻는다. "힘들지 않아?"는 친숙하지만 "편하지 않아?"는 어색하다. 힘들어지려고 태어난 건 아닐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기껏해야 '힘들지만 괜찮아'가 최상급인 세계가 정상이라고 봐야 하는지. 요즘 편해서 살기 좋다는 말이 금기어가 된 듯 하나같이 웃음 대신 울상을 입고 다닌다. 별생각 없이 유행을 따르는 나는 똑같이 힘듦을 걸치고 다녔다.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상황과 맞닥뜨리기 전까진.


변화의 계기는 유독 힘들어하는 사람 덕분이었다. 언제 어디서 만나도 항상 힘들다는 그는 온통  가라앉는 아우라를 풍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기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나마 내게 남아 있던 힘도 빠져나갔다. 가까이할수록 힘이 더 사라졌는데, 신기한  그렇다고 그가  힘을 받아 기운을 차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디론가  새듯 없어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힘이 되지 않는 무용한 만남은 그의 블랙홀 같은 자기 확신,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어' 때문이었다. 그에겐 어떤 말도 꺼낼  없었다. '힘내' 입장을  알지도 못하는  것이 아니었고, '나도 힘들다' 무조건 나보다  힘든 그를 자극할 뿐이었다. 이런 마당에 행여라도 '나는 좋다' 기름을 불난 집에 부을 수도 없었다. 모든  힘든  앞에서 약간의 힘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미안해지는 지경까지 흘러가자, 이건 아니다 싶은 깨달음이  내리쳤다.


안타까웠다. 힘든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없는 그의 삶이. 단순히 사는  힘이 필요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헤어 나올  없는 굴레에 속박되어 힘들지 않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에겐 어떤 인생의 재미도 희망도 찾을  없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지   없었다. 저렇게까지 힘든데  사는 거냐는 극단적 의문마저 솟아났다. 그가 아니라서 완벽히 이해할  없겠지만, 내가 파악하건대 그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 나는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즐겁게 잘살고 있었다. 때론 힘들어 죽겠다는 농담을 엄살떨며 주고받을 여유는 있었다.  프로 진심으로 뱉지 않는 나와는 다르게 같은 용어를 진지하게 사용하는 그를 보며 점점 불안해졌다. 그도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을까. 어느덧 잠식되어 실제로 삶을 힘들게 만든  아닐까 의심했다. 내게도 닥칠  있는 위험의 소지를 인지하자 서둘러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이제는 힘들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설령 진짜로 힘들어도 포기하고 무너질 게 아니라면 꺼내지 않는다. 오래전 어머니의 가르침처럼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한다. 쓸데없는 입놀림을 멈추니 힘이 낭비되지 않아 좋다. 조금씩 나아지는 삶의 안과 밖을 보니 이게 맞는구나 싶다. 괜한 말을 거두고 나니 그전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힘들다는 소리 대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 얼핏 쉽게 지내는 듯하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각자의 힘듦은 늘 있지만 어떤 자세로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누군가는 고통의 토로만으로 점철된 길을 가지만, 어떤 이는 긍정과 행동으로 유유히 나아간다.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는지 뻔하지만, 모두가 그렇진 못하다. 결국 힘이 드는 게 확실한 우리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건 태도였다.


원래부터 사는 건 힘이 든다. 힘이 있어 살 수 있고, 그 힘으로 한 발 한 발 전진한다. 힘이 모자라 쉬기도 하고, 힘이 넘쳐 의외의 일을 벌이기도 한다. 숨을 쉬는 한 함께 뒹굴어야 할 파트너, '힘'을 지내기 힘든 대상이 아닌 내 것으로 삼아 품으려 한다. 보기만 해도 힘들다며 괄시하기보다는 덕분에 힘을 내어 살 수 있는 거라고 다독이며. 너 때문에 힘들다는 시선으로는 절대 힘이 될 수 없으니까. 나와 내 힘에 집중하는 태도는 남과의 누가 더 힘드네 싸움도 막아준다. 쓰잘머리 없이 무기력의 크기를 재보던 헛짓거리는 남는 게 없었다. 지면 최악, 이겨도 차악인 승부엔 절망만이 존재했다. 힘들게 살아가는 서로를 괴롭히지 않고 각자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다. 가진 힘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사용한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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