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마주한 그곳의 광경은 여전히 그럴듯했다. 세련된 건물 속에 가득 찬 똑똑한 분위기. 10년이 넘도록 적응하지 못한 내 것 같지 않던 공기는 변하지 않았다. 쉽게 들이마시고 내뱉을 수 없었다. 차갑고 뾰족한 기운이 콕콕 찌르는 느낌은 그대로였다. 떠나는 마지막 날, 그 안에서 발걸음을 옮기며 담아둔 감정은 알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냉철하고 예리한.
그만두기 위해선 지나야 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인사 담당자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했고, 상사에게 사실을 밝혀야 했다. 팀장으로 같이 지낸 적 없이 자리만 차지했던 팀원이라 민망했다. 선배로서 얕은 인연이 있기에 편안하게 대화하며 뻔뻔히 부탁을 했다. 멀리 떨어진 핑계를 대며 사직서에 당신과 임원의 서명을 받아달라고. 들어올 때는 그렇게도 절차가 복잡하더니 나가는 건 무척 쉬웠다. 거대한 조직의 부속품은 티가 나지 않게 대체될 따름이니.
마지막 단계를 마치자, 문득 처음이 떠올랐다. 합격 소식과 함께 집으로 배달되었던 꽃바구니. 지난한 취업준비생의 동굴을 빠져나온 기쁨에 여기저기 많이도 알렸었다. 내가 이런 회사에 입사했으니 축하해 달라고. 자랑하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떠벌릴 곳이 없다. 내 발로 움직인 건 똑같지만 어쩐지 뽐낼 기분이 아니었다. 텅 빈 마음을 알아준 아내는 꽃다발과 케이크를 선물하며 파티를 열어줬다. 묶여있느라 고생한 지난날을 위로하는 퇴사 축하와 함께. 고마움이 차오르며 묵혀둔 마무리 인사가 기억났다.
휴직 중에 틈틈이 써둔 퇴사 인사에는 가시 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원래는 이 글이 아니라 그 글을 복사해 붙이고 끝낼 셈이었다. 휴직할 때부터 퇴직할 때까지 보이던 부러워하는 이들을 향한 솔직한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누구나 변화를 원하지만 가만히 있는 건, 당장 살 만하기 때문이라고. 입으론 불평을 내뱉어도 붙어있는 건, 절박하지 않아서라고. 그대로 만족하며 살든지, 아니면 뭐라도 좀 하라고 외치는 일갈. 고작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지겹게 고민하던 기나긴 시간을 잊은 채로 뭐라도 된 듯이 적어둔 투명한 헛소리가 부끄러웠다. 결정적으로 오래도록 쓰던 제 잘났단 편지를 지우게 만든 건 내게 다가온 따스함이었다. 퇴직 발령이 나자, 곳곳에 숨어있던 온기가 찾아왔다.
안부와 응원이 도착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인물에게서. 천천히 하나씩 끊기지 않고 계속. 함께 다니는 동안은 나누지 못했던 따뜻함을 막상 나오니 알게 되는 역설이 신기했다. 나만큼 누구에게도 '끝'이란 단어의 힘은 강하게 남는 모양이다. 가까이 지내던 선후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역시 동기였다. 회사 이메일을 통해 누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해야 하나 고심했었는데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퇴사일 전날 밤을 거쳐 당일 새벽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담아 그들에게 날렸다. 함께해서 영광이었다는 제목으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는 뻔한 말처럼 우리에겐 항상 어떤 날이 찾아옵니다. 영원히 시키는 대로, 남이 정해 놓은 대로 살 줄만 알았던 제가 저만의 결정을 했습니다. 지금과 내일에 거는 기대와는 상관없이 지나간 시간은 온전히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이라는 순간에는 더욱 강렬하게 돌아보며 잊고 지내던 추억까지 꺼내 느끼곤 합니다.
100명이 훌쩍 넘는 동기들을 보며,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뛰어난 그들을 보며, 처음부터 지금까지 놀라고 부끄럽고 배우고 지냈습니다. 가끔 회사가 힘들 때면 구석구석에 놓여있는 동기들의 이름을 보며 괜히 묻고 싶었습니다. 지금 어떤 생각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냐고요.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떠나게 되어 다시는 회사 안에서 물어볼 일이 없어졌네요. 역시 후회는 하지 않아서 하는 게 맞나 봅니다.
동기라는 말은 특이합니다. 선배, 후배와도 다르고 친구와도 다릅니다. 같다는 뜻이 들어있는 단어가 주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느낌이 편했습니다. 항상 날이 서 있던 전쟁터에서 같음을 마주하는 순간은 어쩐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미리 올려진 떠난다는 안내를 보고 인사를 건네준 사람도 언제나처럼 동기가 먼저였습니다. 삐딱하고 냉랭한 저를 기억하고 찾아주어 감사했습니다. 조용히 나가려다가 그래도 동기에겐 인사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마지막 날에 들어와 편지를 남깁니다.
자기 소개할 일이 있으면 자주 써먹는 표현이 '식판 밥을 좋아한다'라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정해진 메뉴처럼 주는 대로 먹고살겠다는 저를 보여주죠. 이제는 식판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마음이 더 가는 걸 하며 살려고요. 당분간은 글을 쓰고 책을 내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필요한 이를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나중은 모르겠습니다. 정해진 게 없으니까요.
좋은 것만 기억하며 떠나려 합니다. 남은 삶도 좋아지고만 싶거든요.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같은 날 함께 입사했던 홍석준 드림
최후의 편지를 보낸 그날, 회사 건물에 들어갔다. 노트북을 반납하고 몇몇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쉬움과 감사함을 적절히 섞어 회사라는 그림을 완성했다. 그러는 중에도 답장은 이어졌다. 나를 지지해 주는 같은 날에 들어온 그들의 마음이 좋았다.
"이제 정말 식판을 내려놓는구나!" 한 선배가 전화로 콕 집어 말해준 것처럼, 아끼고 좋아하던 식판을 버린다. 삶을 간편하고 효율적으로 이끌던 물건. 다만,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던. 고통스럽고 긴 고민 덕에 하나의 책으로까지 연결되었던 나와 회사의 오래된 관계는 여기서 끝이 난다. 앞으로는 정해진 결말 없이 오늘을 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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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책에 주신 관심 덕분에 두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인생에서 긴 시간을 차지한 ‘회사’ 이야기입니다. 제목처럼 전 여전히 ‘퇴사’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곧 영원할 줄 알았던 휴직이 끝납니다. 꼭 돌아갈 것 같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이 해답을 줄 수 있을까요?
직장에서 느끼는 온갖 사건과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함께 즐겨주시면 저와 우리가 해나갈 고민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꼭 읽어주시길 추천과 부탁을 동시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책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세 수익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쓰입니다. 이번 책으로는 과로, 우울증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직장인들을 위해 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