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배추 Jun 08. 2024

백일동안 매일 쓰는 일기

43. 비 오는 날의 불국사

비가 왔다. 사람들마다 단출하게 여행 다니는 우리를 보면 혀를 내두르기 일쑤지만, 은근히 챙길 것들은 다 챙긴다. 비가 오길래 서둘러 우비를 꺼냈다. 다이소에서 발견한 천 원짜리 우비. 물론 그 우비는 120cm의 홀쭉이 우비라서 가방을 멘 상태로 입으면 배부터 잠글 수가 없다. 어제 산 연(kite)이라도 버리면 나았으련만, 우리는 끝끝내 연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다 챙겨 오고 말았다. 불교의 도시 경주에서 연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웃음) 다행히 비를 어느 정도 막아주는 우비 덕분에 옷이 덜 젖기는 했지만, 내리꽂는 비의 속도와 양에 발은 이미 잠수상태가 되었다.


어쩌면 불국사를 포기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던 석굴암은 더 이상 굴 속으로 들어가서 볼 필요가 없는 구조였고, 반으로 뚝 잘린 동굴 속에 자리 잡은 불상은 유리창안에서 TV영상처럼 있어서 적잖이 아쉬웠다. 심지어 비까지 내렸으니. 보수를 해서 이래저래 말들이 많았다고는 들었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잊고 있었다. 괜히 동굴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설레발을 떤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우리는 불국사까지 왔는데 석굴암을 안 보고 갈 수는 없었다.


비가 점차 거세졌고,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행여나 등산길을 올라가도 되나 싶어서 안내소에 물어보니 매우 근심 어린 얼굴을 지어 보이더랬다. 난감해하며 눈을 반짝거리는 우리에게 겨우 대답을 해주었다. 약 1시간 정도 올라가야 한다고.


‘그쯤이야.’


티켓은 구매할 필요 없다고 하여 그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0.5km 정도 걸었을 때 그제야 왜 그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갔다. 길은 평이했지만, 은근히 미끄러웠으며 사람이 없었다. 비가 내리면서 안개가 차올라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중반쯤 포기할까 했는데, 걸어온 거리가 아까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올라갔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는데 종소리가 신기루인 것처럼 종은 보이지 않았다. 코너를 돌면 계속해서 위로 오르는 계단만이 무심하게 나왔다.


‘뫼비우스의 띠 위에 있는 건가?‘


중간중간 ‘낙석주의’ 팻말이 걸려 있었고, 가파른 곳은 두꺼운 철근으로 공사된 부분이 많았다. ‘낙석주의’가 ‘낙서주의’로 보이기 시작할 때쯤 다행히 쉼터를 발견하여 잠시 쉬어갔다. 물이 흠뻑 젖은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걸터앉고는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조금만 더’라는 생각으로 다시 오르는데, 계단도 ‘조금만 더’를 외치듯 끊임없이 계단이 튀어나왔다. 야속한 계단.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의 거리는 실제로 약 3km. 보통이라면 1시간 이내에 도착했을 거리인데 비가 와서 1시간보다 조금 더 걸리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내려 가나.’

‘오늘 안에 내려갈 수 있으려나.’

‘낙석주의가 아니라 내가 굴러 떨어지겠으니 배추주의네.’


별별 생각을 하던 때에 다행히 불국사와 석굴암을 왕복운행하는 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저 멀리 보이는 버스를 향해 뛰어갔고, 그 버스는 관광버스인 걸로 밝혀졌지만, 근처에 정류장이 있었으니 해피엔딩.


오는 길에 물어보니 내 작은 친구는 불국사에서 소원 두 가지를 빌었다고 한다. 하나는 케이티엑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비와 땀에 전 우리에게 냄새나지 않는 것. 나머지는 현실적인 소원으로 용돈을 5,000원으로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첫 번째는 대충 이루어진 것 같은데, 두 번째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높아 보인다. 두 번째는 부처님보다 내가 관장하는 부분인데.. 아이의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맛보게 해 줄지, 아니면 ‘소원은 하나만’이라는 원씽을 가르쳐줄지 대단히 고민스럽다. 그런데, 뭔가 신발에서 스멀스멀 걸레 빤 냄새가 나려고 하는 건 두 번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부처님의 뜻이실까?? 범인인 나는 그 큰 뜻을 헤아리기가 참 어렵다.



작가의 이전글 백일동안 매일 쓰는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