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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배추 Apr 29. 2024

백일동안 매일 쓰는 일기

9. 왁스플라워

미국에 살 때, 마트에 가면 한편이 꽃으로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으로 구경했었다. 미국인들이 장바구니에 사과와 꽃을 쑤셔 넣는 모습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꽃 대신 과일이라며 꽃을 실제로 사본 적은 없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사본 적이 있던가? 이 또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 보면 분명 빵이나 실용적인 물건을 사줬음에 틀림없다.


그런 내가 요즘 간혹 꽃을 산다. 양재시장에 다녀온 사람처럼 신문지에 돌돌 말린 꽃뭉치를 들고 집에 오고 싶지만, 그 정도 여유를 부릴 정도는 못되더라도 몇 송이라도 사 오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처음에는 시들어도 걱정 없는 조화를 살까도 했다. 그런데 조화를 놓으면 집안의 좋은 기운을 막는다고 해서 레고꽃을 샀다. 참으로 멋이 없었다. 만들 때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는데, 만들어서 화병에 꽂아 놓은 레고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환해지기는커녕, 레고랜드짝퉁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마음이 동하여 뭔가를 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동요될 때 행동하는 스타일이라, 꽃을 사는 행위는 나와는 거리가 있는 행위였다. 꽃을 사 오면, '우와 이게 다 얼마냐'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마니, 어쩌면 스크루지가 나를 보며 흐뭇하게 쳐다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두 눈이 좋자고, 금방 시드는 꽃을 산다는 건 참으로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꽃이 있으면 기분이 둥실둥실 들뜬다. 예전에는 시든 꽃을 정리하는 일이 버거워서 싫었고, 힘들게 번 돈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화병에서 파릇파릇하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배시시 웃게 된다. 시든 꽃 정리도 익숙해지다 보니 금방 정리하고는 다른 꽃으로 금방 갈아낄 수도 있게 되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후다닥 정리되는 모습이 세상 정 없어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생생하게 생기를 뿜는 꽃은 여전히 좋은걸.


대부분 노란색이나 주황색의 장미나 카네이션을 샀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왁스플라워를 사보았다. 겉모습은 뭉탱이 나뭇가지에 자잘한 꽃들이 잔뜩 피는 아이인데, 꽃말은 변덕쟁이란다. 어쩜 꽃말도 딱 나 같은지. 작은 꽃송이들이 귀여운 데다가 화병에서도 오래 산다고 해서 기대하며 가져왔는데, 집에 와서 꽂아보니 영락없는 공작새다. 그것도 공작새 꼬리만 떼어다 갔다 놓은??


"뭐야 살아 움직일 것 같아. 정말 무서워"


화병 속 꽃을 보고 한 나의 첫마디. 심지어 우리 집에서는 어디 들판에서 꺾어왔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분명 내 눈에는 공작새의 잘린 꼬리로 보였는데, 이제는 어디서 주워온 꽃이 되고 말았으니, 이 왁스플라워는 꽃말 그대로 변덕쟁이처럼 운명도 사람의 의견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했다.


"그러니 왁스플라워여, 너는 너대로 살렴.

모두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거기에 휩쓸리지 마렴.

진짜 변덕쟁이는 네 꽃말이 아닌 사람이거든.“


공작새는 화날 때 꼬리를 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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