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관계과 관계 속에서 회의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속해있는 조직이나 관계의 틈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열망에 숨을 헐떡였습니다.
이때 한 숨 돌리기 위해 찾은 곳. 여수 '용월사'입니다.
'용월사'
돌산읍 산자락, 조용이 숨을 고르는 작은 사찰입니다.
더불어 경내에서 바라보는 남해 바다가 더없이 좋은, 한적하고 소담하게 그리 좋은 곳입니다.
용월사는 관세음보살이 사는 보타락정토를 모델로 세워진 사찰로 해수관음상이 서 있습니다.
경내를 등지고 바다 쪽으로 향하면 좀 더 바다 가까이 내려갈 수 있는 108계단이 있습니다.
바로 용완전으로 이어지는 108계단입니다.
파도 소리를 좀 더 가까이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 길에서 나무를 마주합니다.
나무와 덩굴나무가 하나가 된 풍경입니다.
나무와 덩굴나무. 이 둘은 분명 독립된 존재이지만, 서로 얽히고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덩굴나무는 스스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오를 수 없습니다다.
그 대신 주위의 나무를 감싸며, 나무의 몸을 타고 오르며 자신의 몸을 지탱해 햇빛으로 향합니다.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햇빛을 만날 수 없기에, 덩굴은 나무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 의존은 결코 약함의 징표가 아닐 겁니다.
덩굴나무는 자신이 가진 한계를 받아들이고 타자에 기대어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덩굴나무는 의존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의존을 스스로의 확장 가능성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덩굴나무는 자신의 존재를 키우고,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자신의 세상을 넓혀가며 세상과 닿습니다.
즉, 의존을 선택한 덩굴은, 외부와 관계맺기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나갑니다.
그렇다면 나무는 어떤가요?
나무는 단순한 지지대가 아닐 테지요.
마치 굳건히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 역시 실은 끊임없이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나무 역시 덩굴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존재 양식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몸에 타인을 받아들이고 그 무게와 존재를 함께 짊어집니다.
그렇게 덩굴나무를 품은 나무는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됩니다.
이 둘은 '독립성'과 '관계성'을 동시에 살아냅니다.
덩굴은 타자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나무는 타자를 품음으로써 존재의 지평을 확장해 갑니다.
나무는 덩굴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 안에 그 타자를 끌어들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세계와 얽히며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말을
이 작은 자연의 장면이 증언합니다.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테지요.
우리는 스스로를 강인한 독립적 존재로 만들려 하지만, 실은 끊임없이 관계 속에서 존재를 갱신합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누군가에게 기대며, 또 누군가의 무게를 받아들입니다.
기대고 기대어 선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방식으로 살아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무와 덩굴나무는 말없이 이야기합니다.
"혼자 선다는 것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다."
관계의 회의감 속에서 끊임없이 독립을 갈망하는 요즘.
공생을 통한 나를 나답게 만드는 절대적 타자성을 여수 용월사에서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