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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커 Dec 08. 2022

따듯한 걱정

수요일의 해방일지 #3

어느 골목, 내리막 경사를 이용해 아이들이 저마다의 탈 것을 준비해와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 “이따가 먹으면 안되나?” “그냥 아, 해라 아~” 방금 막 종이 상자를 타고 미끄럼틀을 내려온 아이에게 엄마는 추어탕 한 숟가락을 떠,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미끄럼틀과 한 숟가락, 미끄럼틀과 한 숟가락…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아이의 엄마는 비로소 빈 그릇을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와 친구들이 함께 장난치며 걷는다. 앞장서던 아이는 ‘통큐치킨’ 간판 아래에 서서 친구들을 멈춰 세우고, 조용히 문을 열어 안을 살핀다. “엄마, 내 친구들 왔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생 닭을 자르고 있던 엄마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이와 친구들을 맞이했다. “인사해라, 우리 엄마다” “안녕하세요~” “그래~ 조심히 놀아라~” 짧은 인사 후 아이와 친구들은 다시 제 갈길을 갔다. 그날 밤, 엄마는 아이에게 물었다. “니, 엄마가 닭집에서 일하는 거 안 부끄럽나?” “그게 왜 부끄러운데?” 아이는 사실 엄마의 말 뜻을 이해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그리고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친구들과 함께 ‘통큐치킨’ 앞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문을 열어 엄마에게 친구들을, 친구들에게 엄마를 인사 시켰다.


논산훈련소의 밤.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다.” 6중대 2소대 3분대, 16명의 훈련병들은 저마다 기대에 찬 눈으로 조교의 손에 든 편지 봉투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248번” “248번 훈련병 김!진!우!” 246번, 247번 훈련병의 아쉬운 표정과 248번 훈련병의 기쁘고도 설레는 표정, 그리고 나머지 훈련병들의 부러운 표정이 교차한다. “251번” “251번 훈련병 이!준!석!” “253번” “253번 훈련병 손!민!규!” 이제 마지막 남은 편지 한 통. “254번” “254번 훈련병 박!상!호!” 조교가 돌아가고, 모든 조건과 상황이 동등했던 16명의 훈련병들은 이제 편지를 받은 훈련병과 받지 못한 훈련병으로 나뉘게 되었다. 아이는 편지를 펼쳐 잠깐 읽어보고는 바로 다시 덮어두었다. 가지런한 글씨로 적혀진 인삿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야, 좋겠다. 누구야?” “엄마” “읽어봐도 돼?” “니 맘대로 해라” 편지를 건내 주었다. 모두가 잠든 밤. 아이는 조용히 침낭 안으로 들어가 라이트 펜을 켰다. 눈물이 났다. 편지에 적힌 글자수 만큼의 걱정이 고스란히 마음에 닿았다.


서울로 취업해 자취한 이후로는 거의 매일 밤 전화가 왔다. “밥은?” “아직 퇴근 안 했나?” “일찍 일찍 다녀라” 아마도 엄마는 아이를 걱정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가끔은 그 걱정의 소리가 잔소리로 들리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게 되었다. 몇 번의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고 나서야 잘못됨을 깨달았다. 마음가짐을 고쳐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아이는 휴대폰 속 엄마의 이름을 바꿨다. ‘따듯한 걱정’으로.


아이는 결혼을 했다. 아이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가 생겼다. 어쩌면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엄마가 왜 그렇게나 자신을 걱정했는지. 지금도 아이는 휴대폰에 ‘따듯한 걱정’이라는 글자가 뜰 때면,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받는다. ‘이건 잔소리가 아니다, 걱정이다, 걱정이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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