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위로와 용서가 필요했을지도…
“엄마~, 성당 다녀오겠습니다~~.”
어릴 적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항상 이렇게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미사를 드리기 위해 천주교 성당을 향했다. 항상 어머니보다 먼저 출발해야 했는데, 청년부 미사가 성인부 미사보다 더 이른 시간에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성당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무척 멀었다. 우리 집이 마을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성당을 가려면 골목길을 따라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길을 따라 걸어가면 초등학교가 나오는데, 그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 뒤편으로 가면 조그마한 쪽문이 나왔다. 여기까지 가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쪽문을 지나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허름한 집들과 논밭을 따라 한참을 더 가야 비로소 성당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성당까지 가는 그 먼 길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언제나 동네 친구들과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같이 웃고 떠들며 걸어가다 보면, 멀다고 느꼈던 그 길도 어느새 끝나 있었다. 무엇을 하든 친구들이 언제나 함께 했기 때문에, 나는 지루할 틈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즐거웠다. 같이 걸어가던 그 먼 길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도, 선생님과 같이 교리를 공부하는 것도, 모두 즐거웠다.
신부님도 좋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성당에는 네덜란드에서 오신 하얀 얼굴의 외국인 신부님이 계셨는데, 한국말도 무척 유창해서 미사도 한국어로 했을 정도였다. 내가 친구들과 같이 성당에 도착하면 언제나 성당 입구에서 신부님이 반겨 주셨다. 나는 그 신부님을 놀리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는 했는데, 외국인과 같이 말하는 내가 신기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내가 비록, 이렇게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심지어 세례를 받고 ‘스테파노’라는 세례명까지 얻었지만, 특별히 신앙심이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난 그저 성당에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모두 어머니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당연하게 중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된 것뿐이었다.
왜 어머니가 갑자기 성당을 나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어머니의 삶은 종교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전에는 어머니가 교회나 절에 나가는 것을 본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어머니였는데, 우리가 도시 변두리에 있는 교원 주택으로 이사를 가고부터는 꼬박꼬박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 바빴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하던 부업이 끝나면, 어머니는 성당에 청소하러 가야 한다며 나가기도 했고, 무슨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도 했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활동들을 정신없이 했던 것 같다.
주말이면 평소보다 더 바빠졌다. 성인부 미사가 끝난 후 어머니는 아주머니들과 같이 신자들이 먹을 점심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성당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것을 몇 명의 사람이 준비해야 했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는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식사가 끝나면 당연히 뒷정리를 해야 했고, 그 정리가 다 끝나면 또다시 모여서 기도회도 해야 했다. 어머니가 좀처럼 집에 가지 않으니, 별 수 있나? 나도 덩달아 성당에서 살다시피 할 수밖에.
어머니가 이렇게 바빴던 이유…
그것은 레지오 활동 때문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봐도, 어머니는 레지오 활동을 정말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했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생활비조차도 제때에 주지도 않는 무심한 남편을 대신해서 나와 우리 가족의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그것만으로도 바쁘고 힘들게 살아야 했을 것인데, 어머니는 힘든 기색도 없이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레지오 활동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진심으로 신이 나 보였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레지오 모임에서 하는 봉사활동도, 정기적인 기도 모임도, 청소 활동도, 신자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어머니는 정말 신이 나서 하는 것 같았다. 전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쩌다 길에서 같이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날 때면, 마치 절친이라도 만난 듯이 반가워했다.
당시 어머니는 이상하리만큼 바쁘게 살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과 즐거움이 가득했기에 난 그저 좋았다. 행복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웃음 짓는 어머니가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더 행복했다.
그런데 몇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머니는 정말 행복했을까?’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의문이 든 이유는, 문득 어머니가 언제부터 천주교를 다니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레지오 활동을 했는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무도 오래전 기억이기도 했고,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다녔기 때문이었다.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희미한 기억을 붙잡고 며칠을 고민하고서 나서야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천주교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내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난 후였다는 것을…
자식을 잃은 내 어머니의 마음을 나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단지, 미친 듯이 찾아 헤매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괴로웠을 그 마음을 조금 짐작할 뿐이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주위의 비난을 감내해야 했을까?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그저 참고 스스로를 자책했을 어머니… 누구보다 힘들었을 어머니의 그 마음이 갑자기 물밀듯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레지오 활동에 열을 올리며 몸을 혹사시키듯 그렇게 바쁘게 살았던 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 혹은 당신 나름의 속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지라도, 어머니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니까. 내가 아는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니까.
괴로웠을 내 어머니가 그 어느 때보다도 위로를 필요로 했을 때, 그 누가 그것을 해줄 수 있었을까? 너는 잘못이 없다고, 이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철없던 내 아버지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가?
그 누구도 없었다.
오롯이 어머니 혼자만의 몫이었다.
설사 그 당시 아버지와 내가 위로를 해주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에게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내 여동생은 이미 어머니 곁에는 없었으니까.
그런 어머니에게 위안을 주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신 외에는 없었지 않았을까? 지금의 괴로운 마음을 누구보다 깊게 어루만져줄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어머니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렇게 성당을 향했던 것이 아닐까?
단순한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어머니는 그곳에 앉아 딸에게 전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몇 번이고 전하고 또 전했을 것 같다. 신에게 대신 전하는 것 외에,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어디 있는지 모를 딸에게 신을 통해 대신 마음을 전하면서 조금씩 위로를 받았던 것이 아닐까?
이제와 돌이켜 보면, 어릴 적 내가 환한 웃음이라 생각했던 어머니의 웃음은, 어쩌면 몸이 부서지도록 온 힘을 다해 겨우 얻은 애처로운 웃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