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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TV Apr 30. 2021

마흔이 되어보니 비난이 어렵다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고 싶다 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했다는데, 나는 예전부터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왜 그래야 하지? 설사 나에게 죄가 있다 해도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돌을 던져야 하는 것 아닌가? 비난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똑같이 죄가 있으니까’, ‘나도 잘한 것 없으니까’, 하며 잘못된 행동을 보고도 모두가 침묵하고 방관한다면,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닌가?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도 나서서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눈감아 준다면, 이 세상은 정말 대책 없는 무법천지가 되고 마는 것 아닌가?


그러니,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규범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어떤 잘못된 행동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설사 나에게 똑같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마흔이 넘은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논어의 『위정 편(爲政篇)』에서 공자는 마흔이 돼서는 미혹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난 왜 불혹을 넘긴 지금 오히려 더 갈팡질팡하면서 판단이 흐려지는 것일까? 판단이 흐려지니, 이제 좀처럼 남을 비난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살인이나 절도, 폭력과 같은 범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비난해야 하는 일이니까. 내가 자꾸만 미혹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 사람들의 어떤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 그것이 정말 비난할 만한 일인지 이제는 좀처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젊었을 적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는 나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누군가의 가르침, 선현들의 말씀, 도덕과 예절, 사회 규범, 그리고 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사회적 정의...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 나만의 확고한 기준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들에 대해 정의의 사도가 되어 언제든 당당히 비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삶의 경험들 때문이었다.


난 경험이 쌓이면 모든 것이 좀 더 명확해질 줄 알았다. 확신에 차서 내 잘못을 하나하나 꼬집던 어릴 적 어른들의 모습처럼, 나 또한 경험이 쌓이면 그들처럼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정반대였다. 이상하게도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어떤 행동이, 그리고 어떤 생각이,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 만큼 잘못된 것이라고 정말 확신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첫째, 숨겨진 정보가 너무나 많았다.


예를 들어, 박스를 팔아 근근이 생활하던 세입자를 한겨울에 막무가내로 쫓아낸 임대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사실을 접하게 되면, 나로서는 당연히 악덕 임대인이라며 욕하고 비난할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 일말의 측은지심이 있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며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그 세입자가 쓰레기를 집에 쌓아 놓아 악취 때문에 다른 세입자들이 모두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장애 때문에 취업은 어렵고 수입이라고는 오직 허름한 원룸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수입 밖에 없는데, 함께 살던 노모마저 암에 걸려 매월 치료비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마지막으로 그 세입자가 몇 개월째 월세도 내지 않고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내가 그를 악덕 임대인이라며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라면, 한 번쯤 달리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숨겨진 정보가 너무나 많았다. 내가 비난하고 있는 그 대상의 생각도 모르고,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나 사정도 알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것은 단순히 드러난 결과, 피해를 입은 한쪽의 주장, 이런 것들 뿐이었다. 정보가 너무도 단편적이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다른 쪽의 생각이나 사정을 알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결국, 나로서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둘째, 내 생각이 오히려 잘못된 고정관념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을 보고 결혼하려는 여자를 비난한다. 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니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이니까. 그렇다 보니,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그가 부자라면 신데렐라가 되지만, 돈을 보고 결혼하려는 여자는 흔히 악녀처럼 표현되고는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돈을 보고 결혼하면 정말 나쁜 것일까?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매력이 아닐까? 잘생긴 외모처럼 신체적 DNA 특성에 매력을 느껴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갖지 못한 다른 무엇을 갖고 있거나 능력 있는 모습에 끌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아껴주는 상대방의 마음에서 매력을 느낄 수도 있고, 가장 힘들 때 건네 준 따뜻한 위로에 마음이 끌릴 수도 있다. 만약, 사랑의 관건이 이처럼 상대에게 느끼는 매력이라면,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돈 또한 사랑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가난으로 죽을 만큼 괴로워해 봤던 사람이라면, 그 또한 매력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누군가를 비난할 때 스스로 삼았던 기준이, 혹시나 이처럼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돈을 보고 결혼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돈은 사랑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세상을 살아보니 옳고 그름은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았다. 같은 결과라도 조건이나 과정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지기 일쑤였고, 때로는 오히려 내 생각이나 판단이 틀린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라 단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나의 무지, 나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나는 누군가를 쉽게 비난할 수가 없었다.


셋째, 나쁜 결과가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올바른 판단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축구경기를 예로 들어 보자. 중요한 경기에서 어떤 축구감독이 고심 끝에 마지막 순간 선수 교체를 했다고 하자. 만약 그 경기에서 이긴다면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회심의 전략이었다면 추켜세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진다면 어떨까? 교체 선수를 잘못 투입했다며 감독에게 맹비난을 쏟아 내지 않을까?


바로 이런 점이다. 올바른 판단이 꼭 좋은 결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오직 결과를 가지고 비난할 뿐, 그 과정이나 그런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일부러 지려고 노력하는 감독은 없고, 따라서 그 경기에서 이겼든 졌든 당연히 당시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감독은 어떻게 든 이기는 경기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축구경기를 예로 들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런 경우는 너무도 많았다. 직장 생활은 물론이고, 부부 사이나 친구사이에서도 항상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벌어졌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이런 경험들을 겪다 보니, 이제 단순히 결과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섣불리 비난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마지막 넷째, 도대체 누구를 위한 비난이었을까?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쉽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뱉으면 되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비난이 너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나는 더 괴로웠다.


그동안 나는 참 쉽게 남을 비난하며 살았었다. 인사성이 없다고 비난하고, 어리숙하다고 비난하고, 옷차림이 이상하다고 비난하고, 시합에 졌다고 비난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비난하고… 그렇게 자꾸만 남을 비난하다 보니, 내 마음속에 싫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어졌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어졌다. 사람들에게 자꾸만 실망하는 내 모습이 문득 견디기 힘들어졌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동안 남을 비난했던 것일까?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나를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쩌면 그냥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못마땅했고, 그런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화풀이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랬다.


언제부턴가 누군가를 비난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런 생각들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라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이것은 어쩌면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 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변화가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예전과는 달리 단순히 드러난 결과나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 가지고 순간 욱해서 분노를 쏟아내지 않아 좋았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비난의 이유는 될 수는 없음을 알게 되어 좋았고, 좋지 않은 결과만 보고 비난하기보다는 그 과정과 숨겨진 의도를 한번 더 생각할 줄 알게 되어 좋았다. 무엇보다, 더 이상 싫어하는 사람을 만들며 스스로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요즘 나는 누군가를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먼저 던진다.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그리고,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절박한 심정이나,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겪었을 고민들…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의도치 않게 그려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 내게 아무리 따지듯 심한 말을 해도, 누군가 내 기준에 벗어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내가 웃어넘길 수 있게 된 이유였다.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반응마저 어렴풋이 이해가 돼버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내 마음은 좀 더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졌다.


내 동료, 내 가족, 그리고 내 아내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도 조금은 줄었고,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을 웃으며 다독여 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세상은 분명히 바뀐 것 하나 없는데도, 어쩐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내 마음의 여유로움과 그로 인해 생긴 사람에 대한 너그러움이 너무도 좋았다.


“비난을 잠시 멈추고, 상대를 헤아려 보는 것.”


 선택,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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