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TV Jun 30. 2021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들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고 싶다 ③

“해외연수는 절대 친한 친구와 같이 가는 게 아니야.”


선배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낯선 해외에서 친한 친구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면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 그래서 군대도 친구와 함께 동반 입대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선배는 절대 안 된다는 걸까? 이런 의구심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의아해하는 나와는 달리, 옆에 있던 선배들은 당연한 말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반응이 너무도 이상했던 나로서는 그 이유를 바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친한 친구와 함께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은 반드시 사이가 틀어져서 오기 때문이야. 너는 모르나 본데, 우리 학과 내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야.”

그 말을 시작으로, 선배들은 누구와 누구가 예전에는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데면데면하다는 둥, 만나기만 하면 원수라도 된 듯 서로 으르렁대는 사람들도 있다는 둥, 이런저런 뒷얘기들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도 내 의구심은 여전했다. 친구가 괜히 친구인가?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그런 만큼 서로를 잘 이해하니까 친구인 것이지. 그러니, 서운한 일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서 바로 풀어버리고, 평소에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하면 사이가 틀어질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을까? 만약 함께 해외연수를 떠난 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돌아왔다면, 원래부터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


뭐, 술자리 안주로 삼기에는 흥미로워도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얼마 후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평소와 같이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 나서 영장을 받고 군대에 갔다. 2년 2개월 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마침 좋은 기회를 얻어 친구와 함께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나 혼자라면 감히 용기를 낼 수 없었겠지만, 친구가 함께하고 있어 든든했다.

그리고, 그렇게 1년을 보낸 나는 선배들의 예언대로 친구와 사이가 틀어진 채 돌아왔다.


처음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떠나기 전에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서로 의지하고 양보하며 우리는 잘해 나가고 있었다. ‘이 친구와 함께 한다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에서의 생활도 얼마든지 잘 견뎌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 친구가 있어 믿음직했다. 그랬던 우리 사이가 왜 이 모양이 되어 버렸을까? 한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겪은 소소한 다툼 같은 것은 결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모든 이유는 나에게 있었다.

내 삶의 방식과 생각을 강요했던 것.


그것이었다.




고백하건 데, 평소 내 성격은 온순하고 조용한 편이다. 어떤 큰일이 생겼을 때도 잘 흥분하지 않고, 딱히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뭔가를 내게 부탁했을 때도 웬만하면 잘 거절하지 않았고, 친구들이 뭔가를 제안하면 대부분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었다. 그렇게 워낙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이다 보니, 가끔 친구들이 걱정스럽다는 듯,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아?” 하며 오히려 되묻기도 했다. 그 정도로 난 조용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 누군가의 행동이나 생각을 두고,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갑자기 성격이 돌변해서 내 생각을 누군가에게 무리하게 강요하고는 했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내 생각이 옳고 그들의 생각이 그르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으니, 나로서는 그들의 생각을 탓하며 어떻게 든 바꾸도록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으니까.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라 할까? 그런데, 아무리 설득해도 상대가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정말이지 답답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왜 그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결국 서로 간의 말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어학연수 시절, 친구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 원인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분명 무척이나 친했지만 삶의 방식이나 생각은 너무도 달랐다. 나는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친구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항상 청소는 내 차지일 수밖에 없었다. 생활비가 떨어져 가는 나는 어떻게 든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구하려 노력하는데, 친구는 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가 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냥 한없이 여유로웠다. 참다못한 내가 친구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기 전까지 생활비는 결국 내 차지였다.

친구는 친구대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조금 있다가 같이 청소하자는 친구의 말에도 나는 당장 해야 한다며 조바심을 냈고, 아끼면 당분간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으니 여유를 갖고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자는 친구의 말에도 자꾸만 재촉했으니까.

여러모로 다른 삶의 방식과 생각이 그렇게 조금씩 쌓이고 쌓여 우리 사이는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내 삶의 방식이 옳다고 친구에게 강요한 그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왜 친구에게 내 삶의 방식만이 옳다며 따르도록 그리도 강요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렇게 강요할 일도 아니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고 그것을 겸허히 인정하면 그만인데, 나는 왜 내 생각만이 옳고 친구는 틀렸다고 그리도 편협하게 굴었던 것일까?

알다시피, 익숙한 것을 바꾸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것이 세월이 더해져 만들어진 익숙함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랜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각자의 삶의 방식은, 그 삶의 깊이만큼 누군가의 한마디에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방식이 더 옳은가 따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 생각만이 옳다고 그렇게 친구에게 강요하고 말았다. 그리고 멋대로 화를 내고, 멋대로 실망했으며, 멋대로 미워하고 말았다.

강요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그 친구를, 나는 인정해 주어야 했다. 내 삶의 방식은 나만의 방식일 뿐 상대의 방식이 결코 아니고, 그 방식이 나와 다르다고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일 테니까. 누군가 나에게, “너의 삶의 방식은 잘못되었으니 바꿔야 한다고.” 고 말한다면 나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면서, 난 상대의 생각을 잘못된 것으로 단정하고 받아들이라며 강요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무교인 나에게 힌두교를 믿고 그 교리대로 살라며 강요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민주주의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나에게 누군가 공산주의를 강요한다면? 질문 그 자체는 너무도 극단적이고 비약이 심한 가정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 친구에게는 당시 내가 했던 그 강요가 그와 같은 질문처럼 어처구니없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함부로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종교, 정치, 관습, 문화, 사상과 같이 이미 이념이나 관념의 형태로 자리 잡은 이데올로기부터, 작게는 개인의 취향이나 신념,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한 삶의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알다시피, 이런 종류의 것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 오랜 세월에 걸쳐 경험하고 느끼면서 누군가의 생각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들이다. 그 말은 결국, 지금의 그 사람을 형성하고 있는 바탕, 다시 말해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강요한다는 것은 결국 싸우자는 의미밖에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볼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남을 존중하는, 그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 친구와의 일 말고도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는 일은 많았다. 애정이 깊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만만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남보다는 친구나 애인, 아내와 같이 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특히 더했다.

남에게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짧은 치마를 즐겨 입던 여자 친구에게 바지를 입도록 강요했고, 긴 머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머리를 기르도록 강요했다. 불안하다는 이유로 멋대로 통금을 정하거나 수시로 내게 연락하도록 강요한 적도 있었다. 친구나 아내의 의향은 물어보지도 않고 도와주고 싶다는 이유로 멋대로 참견하기도 했고,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하거나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때로는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 취향, 내 생각, 내 방식을 무리하게 강요한 적은 또 없었는지,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시간이 내게는 꼭 필요한 것 같다.


이전 07화 원치 않는 가르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