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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TV Jun 09. 2022

내게 너무도 어려운 일

향기가 있는 사람이고 싶다 ③

내게 너무도 어려운 일, 그것은 반말이다.



몇 년 전, 조카에게 줄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아내와 함께 근처 대형 마트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뭘 사주면 조카가 좋아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생일인데 학용품을 사기도 뭐하고, 또 돈으로 주자니 그것은 정말 아닌 것 같고, 옷은 개인 취향이 있으니 고르기 힘들고. 정말이지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 우리는 마땅한 목적지도 없이 한참 동안 마트를 배회하기만 했다. 그렇게 점점 지쳐갈 때쯤, 뭔가를 발견한 아내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번에 결혼한 친구들과 만났을 때, 요즘 얘들은 베이블레이드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우리 그것을 살까?”


“응? 베이.. 뭐? 그게 뭔데?”


“음.. 요즘 얘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인데… 팽이 같은 거야.”


“그래? 팽이를 좋아한다고? 좋아. 그럼 우리 그걸 사자.”


마땅히 살게 없어 지쳐갔던 우리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장난감 코너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베이블레이드는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쪽 코너를 꽉 채우고도 부족할 정도로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해서 도대체 뭘 골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멍하니 장난감 코너 앞에서 또 한 번 절망하고 있었다.


그때, 한 가지 묘수가 떠올랐다.


‘그래, 아이들이 가장 잘 알 테니, 아이들에게 물어보자.’


마침 우리와 조금 떨어진 옆에 아이들 한 무리가 베이블레이드를 구경하고 있어서 그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좀처럼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수줍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은, 누군가에게 반말로 얘기해야 하는 이 상황이 내게는 너무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죄송한데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내가 어른이니 아이에게 존댓말을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반말을 하자니 너무나 어색했다. 내 조카면 편하게 말할 텐데, 도움을 바라는 입장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그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다짜고짜 반말은 좀 그렇지 않은가? 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겨우 떼고,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저… 얘들아. 저기 얘들아?”

(얘들아 하고 부르는 호칭부터 어색했다.)


자기들끼리 신나게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작스러운 아이들의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고, 손에서는 진땀이 났다. 난 자꾸만 더듬으려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나쁜 아저씨가 아니라는 듯 한껏 선한 표정을 짓고는 준비해 뒀던 말을 마저 꺼냈다.


“혹시 말이야. 혹시, 음… 누가 선물로 이걸 사준다면, 음… 뭐가 제일 갖고 싶을 것 같아?”


하아… 역시나 실패인가? 나름 자연스럽게 한다고 했는데, 역시 나는 안되는가? 왜 이리 어색할까? 당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존댓말을 쓴다면 달변가처럼 얼마든지 편하게 말하겠는데, 반말로 하려고 하니 너무나 어려웠다. 남들은 잘만 하던데 난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다행히 아이들은 그런 내 복잡한 심경은 안중에도 없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기들끼리, 이것이 좋네, 저것이 좋네, 나라면 이게 갖고 싶네, 이것이 제일 세네 등등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이들 시선이 잠시 사라진 건 나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의 열광적인 토론 끝에 선물은 무사히 샀지만, 그 일이 내게는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었나 보다. 별 일도 아닌 그 일이 지금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난 어쩌다가 어린아이에게조차 이렇게 반말이 어색한 인간이 돼 버린 것일까?


처음부터 내가 이랬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반말을 쉽게 했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 나이 또래에서 흔히 쓸 법한 욕도 감칠맛 나게 잘 섞어가며, 곧잘 말하고는 했었다. 누군가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친구들이 다들 그런 식으로 말했으니까 내 말투에 대해 달리 의식한 적도 없었고, 문제의식도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상황이 변했다. 내가 입학한 학과는 인문과학대학의 어문계열이었는데, 그 당시 어문계열의 특성상 여학생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처음에는 평소 습관대로 욕설을 섞어가며 말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여학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할 수 있냐며 야만인 취급을 했다. 오랫동안 그런 환경에 처해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탓인지, 차츰 욕설이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 입에서 전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가끔 캠퍼스를 누비다가 공대 남학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서로 웃으면서 욕을 섞어 말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알 수 없는 거리낌을 느껴 피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가 졸업 후 기업의 인사업무를 담당하게 된 후로는 반말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사업무 자체가 직원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업이다 보니 직원들에게 존댓말로 대하는 것이 습관이 된 탓이다. 이제는 나보다 수십 년이나 어린 신입사원을 보고도 먼저 다가가 90도로 인사하고, 또 자연스럽게 존칭을 쓰는 상황까지 오게 되어 버렸다. 그런 내 모습에 신입사원들은 당황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대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그러니까 내가 욕을 못하게 된 것은 순전히 환경에 적응한 탓이고, 반말을 못하게 된 것은 일종의 직업병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이런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좋지 않은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정색하며 존댓말을 하면 잘못한 일도 없는데 괜히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나의 이런 태도나 언행이 왠지 모를 껄끄러움이나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 의도와는 달리 더 이상의 친밀한 관계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벽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난,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런 내가 좋다. 왜냐하면, 소리 내어 내뱉은 모든 말에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담겨 있는데, 그중 존댓말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힘이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친구사이에 허물없이 욕설 비슷한 말을 섞어 쓰는 것은, 서로가 갖고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물어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일탈 행동을 봤을 때 외면하지 않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라도 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인지도 모른다. 부하직원에게 때로는 심한 폭언을 해서라도 잘못을 지적하고 행동을 통제하는 것도, 자칫 일어날지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부하직원의 업무역량을 좀 더 높이기 위해 필요한 사랑의 매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욕설이나 험한 말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친구 사이는 더욱 친밀해지고, 사회정의는 바로 서고, 부하직원은 더욱 발전할지 모르지만, 말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힘으로 인해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대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존댓말 밖에 모르는 이런 내가 낫지 않을까?


존댓말 속에 담긴 말의 힘으로, 남을 대할 때 행동이 과격하지 않고, 표정은 표독스럽지 않으며, 언어가 날카롭지 않게 된다면, 언젠가 내가 나이를 지금보다 좀 더 먹었을 때 그것이 곧 나라는 사람의 품격이 되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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