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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TV May 26. 2022

나를 지탱하는 힘

향기가 있는 사람이고 싶다 ②

여름은 참 견디기 힘들다.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해를 더할수록 점점 더워지는 것 같다. 에어컨이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그게 한두 푼인가? 전기료는 또 어떻고? 하지만 괜찮았다. 여름이라고 계속 덥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더위가 가장 심한 2~3주만 어떻게 잘 버티면 날은 금세 시원해지기 시작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오래된 중고차가 한 대 있었다. 열대야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우리는 더운 집을 벗어나 그 차를 타고 정처 없이 한밤의 드라이브를 즐겼다. 더위에 지친 몸을 자동차 시트에 뉘이고 전기세 걱정 없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달릴 때면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큰맘 먹고 천 원짜리 시원한 아이스커피라도 한잔 사서 마시기라도 하면… 그때 기분은 정말이지 최고였다.


밤늦게까지 회사에서 일하다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습관처럼 가장 먼저 바라보는 곳이 있다. 바로 거실 베란다 쪽 한구석에 놓여 있는 1인용 의자다. 그 의자에는 지정석처럼 언제나 내 아내가 앉아 있었고, 아내는 항상 집안에 들어서는 나를 보면 마치 유치원생이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저요! 저요!” 하는 것처럼 웃으면서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며 나를 반겨준다. 금방이라도 의자에서 둥둥 뜰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나는 너무나 좋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온 집안이 깜깜하고 아무런 인기척조차 없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지?’ 하며 손을 더듬어 거실 불을 켜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데, 갑자기 문 뒤에 숨어 있던 아내가 “왁~!” 하며 나타났다. 난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무척이나 놀랐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내는 개구쟁이처럼 깔깔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나를 놀래 주려는 일념으로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하릴없이 숨어서 기다렸을 아내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 집 근처에는 하천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곳은 저녁마다 자전거 타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우리 부부도 그 대열에 살짝 합류해서 매일 저녁 그곳을 걷고는 했는데, 나는 그 시간이 무척이나 좋았다. 봄에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을 볼 수 있어 좋았고, 여름에는 풀내음을 마음껏 맡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가을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왠지 나를 기분 좋게 했고, 겨울이면 차가운 밤하늘의 별들이 내 마음을 투명하게 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걸으며 오늘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좋은 옷에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다는 명품을 들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분위기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분명 그 모든 시간이 아내와의 달콤한 데이트였다. 함께 걷는 동안 내 옆에서 끊임없이 눈빛을 빛내며 재잘거리는 아내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주말이면 가끔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간다. 특별히 살 물건이 있어서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손을 꼭 붙잡고 매장 여기저기를 목적 없이 돌아다녔다. 옷가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가전제품 매장에 들어가기도 하고, 가구나 그릇들을 구경하고, 지하에 있는 식품관을 배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매장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백화점에서 문자로 보내준 공짜 쿠폰으로 커피를 시킨다. 사실, 우리는 이 공짜 커피를 얻어먹으려고 여기 온 것이다. 백화점 꼭대기층에는 소박한 잔디 정원이 꾸며져 있는데 그 한쪽에는 방문객이 쉴 수 있도록 야외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중 빈 테이블 아무 데나 앉아서 평화로운 주말을 느끼며 커피를 마셨다. 비록 그곳은 멋진 카페도, 맛집도, 굉장한 풍경을 지닌 화려한 여행지도 아니었지만, 아내와 나란히 앉아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직장인이면 공감하겠지만, 나 또한 야근이 많다. 일이 남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 빨리빨리 처리하는데도 일은 이상하게도 항상 계속 생긴다. 정말 불가사의하다. 덕분에 매일 야근이다. 내가 이렇게 일 때문에 늦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아내는 매일 같은 시간이 되면 “언제 와?” 하며 카톡을 보내온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 그렇듯, “아직 몰라요.” 하고 답장을 보내는데, 그런 내 답장에 아내는 “빨리 보고 싶어요.” 하고 답을 한다. 매일 늦을 것을 알면서도 십 년 넘게 한결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문자를 보내는 아내를 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내 평소의 삶은 정말 별 것 없다.


주말이 되면 우리는,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잠시 멍하니 쉬다가 밀린 빨래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한다. 청소가 끝나면 보통 TV를 보거나 하는데, 가끔은 음악을 틀어 놓고 잡담을 하기도 한다. 점심은 간소하게 먹는다. 물가가 올라서 마트에서 먹고 싶은 음식의 재료를 사는 것이 아니라, 싼 것을 사서 재료에 맞춰 대충 만들어 먹는다. 나른한 오후가 되면 집에서 잠시 쉬다가 인근에 있는 마트를 가서 장을 보고,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근처에 살고 있는 장모님 댁에 가서 저녁을 얻어먹는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우리의 주말은 거의 이런 패턴이다. 잘 놀러 나가지도 않았고, 여행을 자주 다니지도 않았으며,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다. 답답할 때면 잠깐 집 밖을 산책하기도 하는데, 거의 대부분은 방콕 생활이다.


평일은 말할 것도 없다. 아침에 울린 알람 소리에 부랴부랴 일어나서 대충 씻고 회사에 출근한다. 저녁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오면, 가볍게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씻고 나서 잠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든다. 너무나 평범하고 재미없는 삶이다. 너무 평범해 보여서 가끔은 이런 내가 불쌍해 보일 정도다.


이처럼 내 삶은 쳇바퀴 돌 듯 특별할 것 없고 지루한 삶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나만의 자그마한 행복들이 소소하게 숨어 있다.


주말 아침,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주황빛의 밝은 아침햇살. 그 햇살이 비추고 있는 이불속 아내의 얼굴. 아침에 내려 둔 커피에서 퍼져 나오는 향기. 계절마다 조금씩 바뀌는 베란다 밖 풍경. 드러누운 거실 바닥의 시원한 감촉. 없는 재료로 고민 끝에 창조해 낸 새로운 우리만의 요리.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서 각자 딴짓을 하다가 문득 바라본 아내의 옆모습.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을 썰렁한 농담에도 숨 넘어갈 듯 웃어주는 이의 존재. 함께 걷다가 문득 보게 된 플라타너스의 아름다움. 무더운 여름날 함께 마신 천 원짜리 아이스커피 한잔의 시원함. 길을 걷다가 너무 배가 고파 사서 나눠 먹은 꿀맛 같은 삼각김밥 하나. 정말 소소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삶에 지쳐 힘에 부칠 때 내가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뭔가 대단한 희망이 있어서도, 혹은 금방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떤 가능성이 보여서도 아니었다. 내 지루하고 평범한 삶 속에서 순간순간 느낀 그런 소소한 행복들이 내게 하루를 버틸 수 있는 단 한 줌의 힘을 주었을 뿐이었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그 평범한 일상 속 소소함을 앞으로도 여전히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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