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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TV May 11. 2022

아등바등

향기가 있는 사람이고 싶다 ①

장자(莊子)에 나오는 문구 중에, “정와불가이어해(井蛙不可以語海)”라는 말이 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만큼의 넓이와 깊이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우물 밖 바다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세상 넓은 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이를 때 주로 쓰이는 말이다.


의미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가끔 난 이 “우물 안 개구리” 가 바로 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분명 알고 있다. 이 세상은 무척이나 넓고, 그 넓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각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큰 기업의 CEO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건물 한 켠을 임대해서 자신만의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신만의 기술을 갖고 전문직이나 프리랜서로 활약하는 사람도 있고, 많은 기업들 중 한 곳에 취업해서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똑같이 회사에 취직한 직장인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모두 다르고, 하는 일도 각양각색 모두 다 다르다. 이렇게 세상에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다양한 삶의 방식이 얼마든지 있고, 따라서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약간의 용기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어리석게도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작은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연연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것일까? 또 다른 넓은 세상이 얼마든지 있음을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는 이렇게 작은 ‘우물’ 속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도 내게 그러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성실한 사람이어야 했고, 좋은 평판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고, 누구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사회 초년생으로 부푼 꿈을 안고 회사에 막 입사했을 때부터 나는 매일같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해야 했다.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나중에 해도 될 일을 일부러 끄집어 내 야근을 했고, 혹시나 밉보일까 봐 상사가 예정에도 없던 술자리를 갑자기 제안했을 때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새벽까지 졸린 눈을 비벼가며 함께 술을 마셨다. 일 잘한다는 칭찬 한마디 들으려고 상사가 지금 곤란에 처한 일은 없는지 항상 살피고 눈치껏 미리 준비해 놓았고, 동료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모두가 꺼려하는 궂은일을 자처하거나 어려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주변 동료들의 평판에 민감했으며,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비치기를 바랐다.


이런 내 아등바등하는 삶은 단지 직장인이라는 특수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그랬던 것 같다. 가정에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고,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말썽 부리지 않는 모범생이 되어야 했다.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의리 있는 학우가 되어야 했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직원이 되어야 했으며,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산악동호회에 가입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여하는 회원이 되어야 했다.


지금까지 난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내 의지로 선택해서 걸어 들어간 그 작은 ‘우물’에 나 스스로를 가둬 놓고는, 왜 빠져나올 생각은 못한 채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던 것일까? 처음 내가 스스로 그곳에 들어갔던 것처럼,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데도.


어쩌면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보호해 주던 익숙한 울타리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렇게 쫓겨났을 때 또다시 맨몸으로 감당해야 할 울타리 밖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말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난 항상 내가 속해 있는 무리에서 인정받지 못해 결국 외면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그곳이 회사와 같은 단체이든, 아니면 단순한 개인적인 모임에 불과하든, 일단 한 곳에 소속되면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그렇게 벌벌 떨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든 그 무리, 혹은 관계 속에 온전히 남기 위해 정해진 규칙들을 성실히 따르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으려 애쓰고, 내가 가진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든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그렇게 아등바등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아등바등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 바람과는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고 성과도 더 올린 것 같은데도 설렁설렁하는 듯 보이던 다른 사람들과 평가 결과는 대개 비슷했다. 내 일이 아니더라도 상사가 시키면 내 일처럼 열심히 도와줬는데 승진은 이상하게 나와 인연이 없었다. 매번 주변 동료들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일이 너무도 바빠 딱 한번 거절했는데, 어느새 나는 목에 깁스를 한 거만한 놈이 되어 있기도 했다. 당연히 실망할 때가 많았고, 그에 따라 내 불안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 현실에 점점 지쳐갔던 나는 어느 순간 그 모든 집착을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집착을 포기했다고 해서 내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거나 무기력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내 성향상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내 역할에 언제나 충실했다.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내가 연연하고 있는 이 ‘우물’을 언젠가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도 지금까지의 내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되고 말겠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고 말이다.


생각이 바뀌니 같은 상황에서 내 태도가 변했다. 뭐랄까 내가 생각해도 좀 더 대범해졌다고 할까? 겁날 것이 없었다. 나가라면 나가고, 책임지라고 하면 책임지면 그만이었으니까.


회사라는 조직 특성상 상사에게는 업무지시권이라는 당연한 권리가 있으니 지시에는 따르지만, 그렇다고 마냥 따르지는 않았다. 지시의 목적과 취지를 정확히 확인하려 했고, 때에 따라서는 반대의견이나 전혀 다른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되도록이면 싫고 좋음을 명확히 하려 했다. 더 이상 동료의 시선 같은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되 그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도 회사라는 매개체가 없으면 그저 지나가는 여느 동네 아저씨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집착을 버리니 오히려 모든 것이 잘 풀렸다. 예전이라면 당연하다는 듯이 부탁했을 상사도 이제는 양해를 구하며 내 의견을 물었다. 상사가 오히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평가는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아졌고, 멀게만 느껴졌던 승진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상사가 오히려 더 챙기기 시작했다. 동료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더 이상 없었다.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그렇게 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만으로 정말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변해 있었다.


그동안 난, 도대체 뭐가 그리도 두려웠던 것일까?

지금에 와서는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지금 내가 속한 이 작은 우물이 내 삶의 모든 것들을 걸어야 하는 절대적인 곳이 아님을 인식하고 조급함과 집착을 버린 것만으로 난 스스로에게 당당해졌고, 또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했다. 더 이상 내가 가진 것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릴까 봐, 혹은 누군가에게 외면당할까 봐 두려워하며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뀐 것은 딱 하나, 내 마음뿐인데, 단지 그것만으로 내 삶에는 여유가 생겼고, 그리도 멀게만 느껴졌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세상 일이란 이처럼 참 아이러니해서, 원한다고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최선을 다한다고 언제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때로는 나처럼 모든 집착을 놔 버린 후에야 비로소 선물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니, 더 이상 아등바등 살지 않으련다.

차라리 용기 내어 우물 밖 개구리가 되어 보련다.


그렇게 오늘도 난 또 다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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