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스펙터클-시라트

by 신지승

시라트Sirat을 보고 난 뒤, 몸살이 났다 .며칠동안 자극적인 스토리와 영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최근 몸과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이 영화를 잊어버릴 만한 그 이미지와 견줄 '사건'이 없었기 때문일까? 어떤 복선도 없이 지뢰로 춤추는 사람을 날려버리는 것도 그렇고 음악 축제를 다니며 집 나간 누나를 찾으러 아빠와 고된 여행을 하던 어린 아들을 차안에서 강아지랑 놀던 중에 상상 초월한 사고로 죽게 만든 것도 내 마음에 상처?를 안기게 한 다 . 광학 사운드와 함께 감각의 자극과 우울한 상상을 최대치로 가하는 이 영화는 나로 하여금 다시 '영화가 무엇인지' 묻게 했다.

음악 축제로 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그 축제에 참여하고 또 다른 음악축제로 행하는 이들과 동행하며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3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배경 속에서 역시 마음 따뜻한 이들을 차례 차례 지뢰로 날려버리는 황당하고 비극적 엔딩으로 끝난다.


《Fantail》(2013) 역시 다르지 않았다. 뉴질랜드 남오클랜드의 한 주유소를 두고 마오리족 누나와 남동생 이야기로, 백인처럼 보이지만 마오리로 자란 타니아가 남동생 피와카와카를 데리고 호주로 아버지를 찾아가려는 꿈을 품지만, 결국 주유소라는 문자 그대로의, 그리고 은유적인 감옥 속에 갇힌 채 정체성의 진실과 사랑하던 남동생을 누나가 죽이는 황당하고 자극적인 비극을 마주한다. 주유소는 현대 빈곤이 구축한 은유적 감옥이었고 그 가족의 마지막 만남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두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감독들은 현실이 웃고 신나는 세상이 아니라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구조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듯, 진지하고 엄숙하고 암울의 분위기를 숭배하는 개연성을 무기로 관객을 신도삼아 황당한 주문을 뱉는 사이비교주같기도 하다.


영화를 너무 행복하게 그리면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행복하게 그리지 않으면 삶의 구조를 드러내는 용기와 더불어 너무 암울하고 폐쇄적인 상상력에 그들을 가둔다고 한다. 가난,주변인들은 항상 우울하고 비극적인 삶만 놓여져 있다고 보고 싶지 않은 나는 새로운 방식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어차피 상업영화나 독립예술영화 둘 다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나의 눈에는 순간적인 웃음이 진실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영화는 어느 누구에게는 일상을 모독하고 배반하는 것 일수도 있었다.

시간과공간이 다른 다양한 삶이 가진 미세하고 다양한 지층을 삭제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크다.


《Sirat》는 비현실적이고 반추상적인 이야기 위에 초감각적 폭력을 가하는 방식이다. 둘 다 결국 폭력을 스펙터클화한다는 점에서 같다. , 《Sirat》는 추상적 서사 위에 물리적 충격을 얹어 관객의 감각을 직접 공격한다.

《Fantail》은 다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전개를 통해 다른 방식을 택한다. 폭력보다는 타이아와 주유소의 지배인 그리고 본사에서 파견된 남자등의 등장인물들은 따뜻하고 희망적인 배경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조마조마한 불안을 그칠수 없도록 한다. 빈곤하고 소수자이면서 주변부 삶으로서의 정체성, 가족 붕괴를 다루다 보니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 아니라 비극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게 만든다. 덜 자극적이지만, 어쩌면 더 정직할 수도 있었는데 결국 감독은 남매를 비극 위에 방치한다. 이 모든 것이 비극의 스펙터클을 자랑하고 그 오랜 작가영화의 지루한 의식이고 관습이라는 생각이 미친다.


예술영화는 어쩌면 타인의 고통을 안전한 거리에서 소비하는 역할일 뿐인가? 고통은 극장과 컴퓨터에서 소비되고, 나는 아무런 후발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 비극의 관습화에 몸을 맡기고만 있다


독립·예술영화의 많은 이야기와 엔딩은 고흐의 비극,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혼돈으로 닫힌다. 이것은 이제 문화가 되었다. 해피엔딩은 타협이고 상업성이며, 비극은 진정성이고 예술성이라는 이분법에 진력이 난다. 그들은 이제 더욱 더 관객을 향해 감각적인 포르노그라피적인 전략을 취한다. 이야기는, 공동체는, 왜 ? 가난하고 주변부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구원이 될 수 없었는가? 왜 배고픈자에게 양식이 되지 못하고 무료한 자들의 소비만 채우는가 ?

오늘날 독립영화는 개인 단위 소비, 성과 중심 평가, 실패 제거를 전제로 상업대중영화와 같은 궤도로 작동한다. 이 구조 안에서 모든 예술적 시도는 이 되지 않고, 이력이 남지 않으며, 유명해지지 않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게 되었다.


종교는 가까워졌고, 책은 넘쳐나며, 영화와 예술은 과잉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서커스가 마을로 오던 시절보다 지금이 더 인문학이 풍족하고 더 예술을 통해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 질문은 향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문화가 무엇으로 작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서커스는 완성도가 높은 예술이어서 기억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을 전체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건을 공유했던 드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그때 콘텐츠가 아니라 사건이었고, 소비가 아니라 목격이었다.그런데 이제 공동체는 소멸했고 예술은 돈이 되지 않는 가난한 자들의 웃음과 희망의 상상을 잊었다.

《Sirat》와 《Fantail》은 무엇을 목격하게 하는가? 《Sirat》는 이제 저예산영화에서라도 전쟁의 폭력을 개인이 혼자 광학사운드와 시각적 스펙터클로 감당하게 하고, 《Fantail》은 주유소 감옥에 갇힌 소녀와 순수한 남동생을 혼자 관찰하게만 한다. 나는 어둠 속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결국 삶과 예술의 화두로 삼지 못한 채 혼자 충격받고, 혼자 극장을 나선다. 어디서나 이야기의 스펙터클로 나의 여린 감각을 혼돈의 낭떠러지로 밀기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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