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전쟁 : 거제 장승포를 찾아서
오늘 만 4일째 우리 집 에어컨은 씩씩하게 돌아갑니다.
이곳 대구는 항상 여름이 다가오면
언제 에어컨을 개시하느냐가 고민입니다.
한번 켜면 여름 내내 그냥 틀어두는 게 낫습니다.
몇 년 동안 경험으로 어차피 요즘 나오는 인버터 에어컨은
일정시간 켜고 끄는 동력이 훨씬 더 많이 먹는다 합니다.
그래서 그냥 쭈욱 꼅니다 작년부터
그런데, 올해는 6월부터 에어컨을 틉니다
장마, 며칠 흐리다 말았습니다.
올해 조졌습니다..ㅠㅠ
년 전에 구순을 향해가는 어머님이 어느 날
"쇠배를 탔어..
거지도 그런 거지 떼들이 없었어, 국민방위병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먹지 못해 그냥 죽고 길거리에 버려졌어"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625 이야기예요?"
약간의 치매가 오신 어머니는 한 번씩 혼자서
유년으로 여행을 떠나시는 것 같습니다.
"고아원에 언니랑 같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등대 아래 가서 그늘에 숨어서 자곤 했어"
어머니가 8살 무렵 거제에서 피난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거제로 향했습니다.
새로 생긴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까진
너무나 가까운 길이 되었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거제가 아주 먼 상상의 곳 정도로 기억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한 번도 거제에 가고 싶다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유년의 아픔을.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어머니의 아버지는 전쟁 전 49년쯤
함흥인근 선진이란 곳에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고 북한정권의 수립과 맞물려
엄청난 고난을 받으시다 결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결핵 치료를 위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마산 결핵요양원으로 먼저 월남해 계셨습니다.
마산 결핵요양원은
가곡 :가고파"의 가사에 나오는 바로그 내 고향 남쪽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 있습니다.
결국 전쟁은 났고
조각난 기억으로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언니, 오빠의 손을 잡고
피난길에 올랐나 봅니다.
조각난 기억의 또 다른 한쪽.
언젠가 동산병원을 모시고 갔었는데
" 저 언덕에 천막을 치고 살았어, 어느 날 풋과일을
먹고 배탈이 나서 죽을뻔했어"
어머니의 기억에 청라언덕, 동산의료원 언덕에서 미군들과 함께
천막 피난생활을 했었다 기억하셨습니다.
함흥에서 1,4 후퇴 때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든 쇠로 만든 배 중 한 척의 사진 / LST라 불리는 수솔선이라 합니다.
옛이야기들을 들으며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 장승포에 도착했습니다.
맛있는 회 한 접시하고
나이 지긋한 횟집 주인에게 피난민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바로 그 바닷가. 그 등대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단편적인 기억은
거지 떼들이라 기억하는 국민방위병들과 함께
아마도 포항 어디엔가로 떠나신 것 같습니다.
그 길에서 죽음의 행진을 보았고
함께 승선한 쇠배에서 엄청난 장면들을 목격하셨나 봅니다.
"쇠배를 탔어"라는 기억은 아마도 유년의 전쟁, 외상 후 트라우마였을 듯합니다.
평생을 가슴에 그냥 묻고 지내다, 치매와 함께
트라우마가 기억으로 다시 살아나신듯합니다.
그날 찾았던 다시 고아원은 돌아와 역사기록을 찾아보니 1952년에 설립되어
아마도 실제 어머니가 계셨던 확률아 낮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낸 사료 저 사진이 바로 고아원이었고 현재는 어린이집으로 명칭도 바뀌었다 합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가 기록을 대조해 볼까 합니다.
현재 장승포 항구입니다. 방파제 끝에 당시 등대가 새 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쇠배를 타고 물도 음식도 없이 거제까지 향한 쇠배에서
국민방위병들은 죽어나갔고, 아비규환의 밤과 낮을 쇠배에서 보냈나 봅니다.
거제에서 피난민들을 내려놓고 제이국민병을 실은 그 배는 제주까지 같습니다.
사료를 찾아 맞춰보니
함흥에서 출발한 바로 그 배편은 아니었지만 겨울에 함흥에서 출발한
1.4 후퇴 피난민들은 포항을 거치지 않고 곧장 거제로 향했고
그 후, 어머니는 풋과일에 배앓이를 했다 했으니 이듬해 늦은 봄
거제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리려 그린게 아닙니다. 그냥 만년필 들고 있었는데 어머니 사료를 찾으면서 본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림으로 그리니 평화롭습니다
어머니가 그 고아원에 들어간 것은
외할머니가 고아원에서 식사를 돕기 시작하면서
이모님과 어머니가 자연스레 고아로 등재된 것 같습니다
아마 이름이 올라야 고아원의 지원도 커졌을 테니까요
한편 결핵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외 할아버지는
환자의 신분으로 병원 안에 직접 다른 환자들과 함께 일일이 돌을 져다 나르며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그 교회는 결핵환자들이 만든 "베델교회" 흔히 돌교회라 불렸으며
안타깝게도 근년에 많은 논란 가운데 철거를 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외할아버지는 베델 교회와 함께
마산시 가포동 산비탈에 또 다른 교회 " 가포교회"를 개척했고
지금도 그 교회는 열심히 예배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결국은 외할아버지는
부인과 자녀들이 거제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
눈물의 상봉을 하고 마산 가포동에 정착했습니다.
요즘 ai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구술을 기초로 ai와 협업하며 어머니의 유년의 기억을 조립 중입니다.
년도와 팩트 중심으로 일일이 출처를 찾아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년의 기억이 정확히 조립되고 있습니다.
6월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지역으로 갈라 치기 하던 시대를 넘어
이념으로 갈라 치기 하던 시대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 지긋지긋한 이념으로 어머니의 유년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평화가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뜨거운 여름이 시작됩니다.
정부도 바쁘고
나는 또 어머니의 유년의 역사를 조립 중이고
아버지의 일가를 만나 결혼하는 역사까지 정리 중입니다.
작년 장승포에서 노부부의 뒷모습니다. 올해 어머니는 거의 거동이 힘드셔서 걱정이 심합니다. 유년의 상처, 민족의 상처들이 치유되고 오늘 만큼만 건강한 삶들을 살아내시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