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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생이라는 단어는 과연 존재하는가?

조진웅을 위하여

by 여운


갱생이라는 단어는 과연 존재하는가?



최근 배우 조진웅이 과거 십 대 시절의 소년범죄 이력이 디스페치에 의해 공개되며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갑작스러운 고백과 은퇴가 단순한 도덕적 논란을 넘어, 그가 그간 펼쳐온 소신 있는 독립운동 관련 활동 등 특정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침묵을 요구하는 외부의 저의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냐는 추론, 거기에 쿠팡의 정보유출등 최근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덮으려도 의도까지 의심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미성년 시절의 과거를 고백하고 무대에서 물러나는 행위가, 사적인 참회를 넘어 사회적 심판과 정치적 공방의 대상이 되는 이 현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의 선택은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조진웅은 루머가 확산되자 과거의 소년범죄 사실은 인정하되, 성범죄 연루에 대해서는 명백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논란의 확산을 막고 모든 책임을 지기 위해 즉각적인 은퇴를 선언하며 대중 앞에 섰습니다. 그간 쌓아 올린 이미지와 공인으로서 이뤄낸 현재의 삶을 스스로 내려놓는 이 행위는, 피할 수 없는 과거의 무게와 마주하는 한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고백을 보며 우리 사회에 과연 '갱생'이라는 단어의 실존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진웅의 소년범죄 이력을 두고 사회는 비난옹호로 첨예하게 갈렸습니다. 비난하는 이들은 '공인은 더 높은 도덕성을 지녀야 하며, 과거의 범죄는 그의 현재의 자격을 박탈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옹호하는 이들은 '이미 법적 처벌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 성실하게 살아왔으며, 회복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라고 반박합니다. 특히 소년법 제70조의 비공개 원칙은 소년의 미래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인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약속을 깨고 과거를 영원히 현재로 소환하며 '영원한 죄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조진웅은 자신의 삶을 통해 책임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과거를 숨기거나 변명하는 대신, 스스로 가장 소중히 여겼던 직업을 내려놓음으로써 책임을 말없이 실천했습니다. 수년간 독립운동을 기리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선행을 이어온 그의 묵묵한 삶은, 갱생이 누군가의 입술로 하는 선언이 아니라 삶의 지속으로 증명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갱생은 실천으로 쌓아 올린 삶입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심판대에 올려놓으며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갱생이 없다면 희망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 과거의 삶을 통해 현재를 다시 심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도대체 조진웅에게 허용된 앞으로의 삶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더 높은 공인의 책임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는 배우로서 사회 일원으로 완벽하게 복귀했으며 이후 그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조진웅배우와 관련한 도덕적 법적인 논란을 우리는 알지 못하며 오히려 사회적 참여를 통해 건강한 구성원으로의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이 보다 더 높은 공인의 책임이 무엇일까요?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며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삶으로 증명한 것 이것 이상의 공인의 책임이 있을까요.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진정한 관용이란, 과거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과거를 알게 되었을 때 관용 대신 즉각적인 단죄를 선택합니다. 장발장이 빵 한 조각 때문에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는 한 인간이 과거의 과오를 청산하고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사회적 시간을 허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과와 진정성은 완벽한 속도가 아니라, 과오를 인정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는 지속적인 삶의 태도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과거를 가진 존재로서, 타인의 회복에 필요한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유해야 합니다.



한 개인이 과거의 흠결을 딛고 공동체의 건강한 일원으로 거듭나려 할 때, 사회가 그 회복의 과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 것이 이 사태의 핵심입니다. 조진웅의 은퇴는 그 질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재 수준을 보여주는 씁쓸한 지표일지도 모릅니다.






소년범죄를 파묘하여 도덕성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은 어쩌면

한 인간의 갱생의 의미 따위는 안중 에도 없이

정치적, 사회적 현안을 덮고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의도와 기획일 수도 있다는

현실 앞에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소모되고 생명마저 활용된 사건들이 얼마나 더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이선균이 생각나고

이슈를 연예인으로 덮는 이런 정치 놀음에

또다시 놀아나는 스스로가 한심 해 지는 것은

또 다른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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