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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May 30. 2020

南道行


  저녁 하늘이 붉게 몸 푸는 곳으로 우리는 간다. 사람이 사는 곳 
이리도 적막한데, 해 저문 오욕의 역사를 풀어 보내는 저 江을 보라. 모든 저무는 것들 여윈 가슴에 묻고 이제 곧 밝을 내일을 준비하는 저 무르팍 실한 섬진강. 풀잎도 이곳에서는 붉은 꿈을 꾼다.


  바람도 선 채로 붉어지는 이 저녁의 언저리. 내 귓불까지 끝내 
붉히는 서러운 일몰. 이강에 온통 흩어져 내게 조용히 붉은 하늘 맞닿은 곳까지 손잡고 물처럼 흘러가자 한다. 너도 몸 풀어 흔들흔들 붉게 붉게 흘러가자 한다.

 

 무르팍 실한 섬진강,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이곳에서는 산 것도 죽은 것도 붉은 꿈을 꾼다.



                                                                               - 1988년 광주행 버스 안에서




옛 노트 속에서 발견한 1988년의 글


1988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광주로 향해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잠이 들다 깨다 하다가 문득, 버스 안이 온통 발갛게 물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섬진강을 지날 때였나 봅니다. 붉은 노을을 온 대지와 강과 버스 속을 다 붉히고 있었습니다. 

내 귓불과 얼굴 마음까지 붉혀 버렸습니다. 

 나도 그때는 노을처럼 붉은 나이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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