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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Apr 06. 2021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느낄 때

오늘을 사는 러너의 방식

몇 년 전 서울 국제 마라톤이 끝난 후 동호회 지인이 다음 카페에 짧은 후기를 남겼다. 한때 무릎에 물이 차 달리기는커녕 걷기조차 힘들었던 그는 수술과 재활을 통해 무릎 부상을 극복했다. 이 바닥에선 나름 전설적인 사연을 가진 사람이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격적인 후기의 마지막 문장에는 '오늘을 사는 남자'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의 재활 과정을 끝까지 읽으며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달리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하면서까지 달려야 하나 싶을 것이다. 그 말도 맞다. 그런데 사람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할 때와 스스로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것을 할 때 진짜 산다고 믿는다. 그걸 못할 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무릎으로 고생할 때 그에겐 오늘이 없었다. 즐겁게 달리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오늘을 허비했고 다시 달릴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오늘을 날렸다. 그의 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처럼 과거의 안타까움 또는 영광에 취해, 때로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거나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오늘을 소비할 때가 많아서다. 그가 '오늘을 사는 남자'라고 한 그날부터 오늘을 살았다고 하면 과장이지만, 그날 이후 나는 좀 더 오늘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잠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바꾸지도 못하는 어제를 후회하느라, 일어나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느라. 잠을 잘 자는 방식도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하다. 오늘을 연장하는 거다.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걱정을 벗고 오늘을 길게 보내는 거다.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 읽고 싶은 책을 펴고 쓰고 싶은 글을 고, 그것도 아니면 미쳐 보지 못한 드라마를 정주행 하거나. 그렇게 하루를 더 길게 보내다 보면 하품이 나고 도저히 오늘을 연장할 수 없을 때 다시 침대로 가면 된다.


혹자는 '잠을 못 자면 내일 문제가 생길 텐데... 괜찮을까?'라는 생각할 것이다. 알고 보면 그것도 닥치지 않은 내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 아는 는 왜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걱정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할까?그러게 말이다. "너도 알잖아."라고 답해주고 싶다.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신이 아니라서.


예년에 비해 벚꽃은 보름 정도 일찍 만개했다. 과학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내가 굳이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마침 올해만 더웠는지 따져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계절의 시계가 빨리 돌아간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벚꽃은 만개했을 때 비가 내리면 한순간에 끝이다. 일찍 만개한 벚꽃은 좋은데 비가 온다니 마음이 급해졌다. 틈날 때마다 벚꽃을 찾아다니며 오늘을 누리고자 했는데, 몇 번 누리지도 못하고 끝날 판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벚꽃 러닝은 없을 게 뻔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꽃이 좋아지는 이유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꽃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건지, 여성호르몬이 증가해서 인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는지. 항상 원인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건 너무 피곤한 일이다. 또 쓸데없는 일에 소비하는 건 정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다 인생을 망친 사람도 많다. 그래도 누가 공짜로 알려주면 좋긴 하다. 맞다. 누가 그러더라. "그때는 니가 꽃이었다고." 그 말이 정답 같기도 하다.   


비가 예보된 토요일. 비가 내리기 전에 달리기 복장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만개한 벚꽃에 더해 공기마저 유쾌상쾌했다. 벚꽃이 터널을 만든 오솔길을 따라 달리기를 하고 주말마다 차 없는 도로가 되는 벚꽃 차도를 달리며 오늘을 누렸다. 오늘이 아니면 사라질 벚꽃 러닝이었다. 30분을 달렸더니 땀이 솟았다. 달리기가 만든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오늘을 달리는 나를 구름 위에 태우는 순간이었다.


벚꽃 러닝

들고 간 셀카봉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운동 사진은 정색하고 찍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동작이 더 역동적이고 좋다. 사진을 바라보며 호박은 지우고 수박만 남겼다. 똑같은 사람인데 호박이 되고 수박이 되는 이유는 빛과 동작 덕분이다.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비가 쏟아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는 나만의 법칙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봄비라기보다는 비바람에 어울렸다. 벚꽃은 속절없이 꽃비가 됐다.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벚나무의 마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밀려오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 꽃이 됐다는 말로 벚나무를 위로했다. 달리지 않았다면 벚꽃과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뻔했다.


하루가 지난 일요일, 비 예보가 있었는데 비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러닝 옷을 입고 이번에는 나만의 동네 둘레길을 향해 달렸다. 바닥에 내린 벚꽃이 온통 거리를 덮어 꽃길이 되어 있었다. 축제가 끝난 후의 느낌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그걸 아쉬워하기보다는 오늘이 주는 초록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불암산으로 향했다. 초록초록했다. 그동안 헐벗은 나무들이 초록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곰을 데려온 초록 러닝

달리기를 마치고 내가 달린 루트를 살폈다. 귀여운 곰이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손으로 그려도 그보다 잘 그릴 수 없는데, 발이 만들어낸 곰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손과 발을 서로 바꿔야 각자 제 기능을 발휘할지 혼동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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