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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Apr 29. 2021

자작 소설 <삼대>

7화. 추석에 일어난 일

1969년 9월 26일, 춘삼이는 입대 후 처음으로 추석을 맞았다.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일할 때만 해도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있는 고향 생각에 들떴는데, 군대에 있으니 한숨만 쌓여갔다. 중대 전술평가가 끝난 날부터 대대적인 부대 청소가 시작됐다. 이제 갓 부대에 배치받은 이등병의 머릿속에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올 리도 없고 죽은 귀신이 부대까지 올 리도 없는데 왜 청소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돌아다녔지만, 조금이라도 군대 생리를 파악한 장병들은 투덜대며 잡초를 뽑고 바닥을 쓸고 닦고 밀며 청소했다. 이병 일병 상병에 비해 일도 하지 않는 병장들의 입에선 수시로 욕이 튀어나왔다. "연대장 새끼, 추석 때 위문품도 안 갖고 오는 주제에 순시는 왜 하고 지랄이야"


그들이 뿔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작년 1월 21일, 31명의 북한 괴뢰군들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실패로 끝났으나 그 일이 터진 이후 육군의 복무 기간이 30개월에서 36개월로 늘어났다. 복무 중인 장병들의 복무 기간도 조금씩 연장됐다. 전역 날짜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군인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 사건만 없었다면 30개월 이상 군 생활 한 병장들은 추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추석 당일 새벽 6시, 기상나팔소리와 불침번의 "기상" 외침에 부대원들은 연병장으로 튀어나갔다. 당직 사령에게 인원 보고를 마친 후 바로 연병장 청소를 시작했다. 매일 실시하던 알통구보는 생략됐다. 각 소대별 지정된 장소의 청소를 끝내고 내무실로 들어갔다. 내무반 정리를 마치고 당직사관의 점검을 끝낸 소대부터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 후 모든 부대원들은 7시 50분까지 내무반에 위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연대장은 9시 전에 온다고 했다. 이제 막 부대에 들어온 이등병들은 그런가 보다 했지만, 한 번이라도 군대에서 명절을 보낸 장병들의 입은 오리주둥이가 됐다. 긴 주둥이로 물을 먹듯 하염없이 입을 오므렸다 다물었다 했다. 혹시라도 간부가 들을까 봐 목소리는 들릴랑 말랑했는데, 자세히 귀 기울이면 이런 단어들이 개미 떼처럼 이어졌다. "조옥가튼..."


8시가 되자 대대장과 참모 장교들은 위병소 앞에서 연대장을 맞을 준비를 마쳤고 중대장과 소대장들은 각 소대 내무반 점검을 끝냈다. 간혹 촛대뼈를 까이는 사병들도 있었지만, 별 탈 없이 연대장을 맞을 시간이 다가왔다. 8시 30분 즈음 됐을 때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대대장의 "단결"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몇몇 오리주둥이의 입에선 "킥킥"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툭 튀어나온 배를 뒤뚱대며 연대장 앞에서 굽신댈 대대장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탓이다.


30분쯤 뒤에 상황이 해제됐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연대장은 바쁜 일이 있어서 대대장실에만 잠깐 들렀다 돌아갔다고 했다. 30개월 이상 군 생활을 한 병장들의 입에선 욕이 춤을 췄다. 온몸에 잔뜩 들어간 힘이 조금씩 빠지고 여기저기 소란한 소리를 틈타 장병들의 입에서 나온 욕들은 여기저기서 핑퐁 게임을 했다. 그중에 성질 급한 병장 하나가 화풀이를 한답시고 이등병을 향해 발을 놀렸는데, 철없는 이등병이 피하는 바람에 촛대뼈를 침상 모서리가 부서져라 때리고 말았다. 병장이 떼굴떼굴 구른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이빨을 꽉 깨물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겨우 참았지만, 눈물은 아랑곳없이  눈가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후임병들도 이빨을 꽉 깨물었지만, 흔들리는 뱃가죽은 어쩌지 못했고 일부 장병들은 화장실이 급하다며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병장의 발차기를 피한 이등병이 우리 춘삼이일까 안타까워하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다행히 춘삼은 아니었다. 그 이등병은 그날 싸다구를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벌통에 들어간 것 마냥 부어올라 사람인지 괴물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전 대대를 한 바퀴 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대별 단체 추석 차례는 예정대로 이어졌다. 연병장 한쪽에 설치된 차례상에 소대장이 대표로 술을 한잔 따르고 병사들은 일제히 절을 두 번 했다. 차례는 그것이 끝이었다. 차례상에는 장병들이 평소에 보기 힘든 돼지고기 수육, 떡과 과일 같은 제법 그럴듯한 차례상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장병들의 얼굴은 이전에 볼 수 없을 만큼 해맑았는데, 곧 술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병들은 곧 마실 막걸리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서둘러 내무반으로 이동했다.


술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11시부터 1시까지였다. 술을 마신 후에는 경계근무자를 제외하고는 전원 취침하도록 되어있었다. 11시부터 6시까지 춘삼이가 속한 5중대는 경계 근무가 예외였지만, 6시 이후에는 경계근무를 서야 했다. 


막걸리 수령은 각 소대 막내들 몫이었다. 소대마다 배정된 막걸리의 양은 말통 반 통이었다. 750 밀리리터 막걸리로 계산하면 12병에 해당된다. 소대별 평균 30명 정도니까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는 수준이다. 더 주면 좋겠지만, 군대는 무엇이든 부족한 곳이니까 어쩔 수 없다. 5중대는 약속대로 막걸리 세 통을 받았다. 무제한은 아니었지만, 말 통 세 통이면 750밀리리터 72병이라 소대원 전원이 취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술을 배급하기 전 대대장은 전 중대장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렀고, 5중대장에게는 각별한 주의를 지시했다. 


각 소대 막내가 술을 가지러 가는 사이 부대의 일병과 상병들은 취사장에 가서 밥과 반찬을 가져왔다. 그래 봐야 무김치와 콩나물이 전부였지만. 이날만은 특별 안주가 준비돼 있었다. 두부와 돼지기름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볶음 김치를 더 많이 얻어 가려는 아부와 신경전이 취사병과 각 소대의 선임 상병들 사이에 펼쳐졌다. 평소에 취사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상병들은 의기양양하게 소대로 진격했고, 그렇지 않은 소대원들은 절인 배추처럼 풀이 죽었다. 하지만 그들도 내무반으로 들어가는 순간 의기양양하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제일 많이 가져왔습니다." 


술 마실 시간을 1초라도 더 확보하려는 장병들의 마음이 한데 모여 술자리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음식이 다 세팅되자 5 중대장은 각 소대를 다니며 주의 사항을 알렸다. "마음껏 마시되 1시가 되면 전원 취침해야 한다. 암막은 반드시 치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소대원들의 대답 소리는 천장을 뚫을 것 같았다.

"편히 마실 수 있도록 소대장도 자리를 비울 것이다. 내무반장은 책임지고 관리하라. 취한 병사들은 먼저 자도 좋다."

"예, 알겠습니다." 몇 명의 고참 병장들은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사라지자 삽시간에 소란해졌고 일병들이 나서 막걸리를 반합에 담아 배급했다. 술은 충분했으니 서로 먹겠다고 다툴 일은 없었다. 고참 상병들이 주축이 되어 술자리 분위기를 띄웠다. 이등병부터 병장까지 고루 막걸리 잔을 채우자 최 병장이 일어나 한 마디 했다. "묵고 죽자" 네 글자가 전부였다. 일부는 어리둥절했고 일부는 웃었다. 곧이어 모두 다 같이 외쳤다. "묵고 죽자"


장병들의 자세를 보면 계급이 보인다. 무릎을 꿇지 않았다 뿐이지, 벌을 선 듯한 자세는 이등병이고 허리와 다리의 각도가 휘어질수록 계급이 한 단계 높은 장병들이었다. 병장들에게서는 각도라고는 찾을 수도 없었다. 

허리를 가장 직각으로 곧추세운 사람은 춘삼이었다. 춘삼이 막걸리 잔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고 내려놓자 맞은편에 앉은 이 상병이 말했다. "야, 김 이병, 마음 편히 한잔해.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도 된다고. 방금 최 병장님이 말했잖아, 묵고 죽자고"

춘삼이는 주위 눈치를 보다 양옆에 앉은 김 일병과 곽 일병의 빈 잔을 본 후에야 막걸리를 쭈욱 들이켰다. 오랜만에 마시는 막걸리 맛은 낯설었지만, 조금씩 기분이 좋아졌다. 소대 막내의 주위에 병장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와서 막걸리를 건넸다.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물어보는 질문은 한결같았다. "여자 친구는 있냐? 어디까지 해봤냐? 누나나 여동생은 있냐?"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여자 친구는 없지만, 누나들은 있습니다."

이어진 질문도 한결같았다. "누나를 소개해달라, 누나는 예쁘냐? 뭐 하냐? 여자 친구는 진짜 없냐? 스무 살이 되도록 여자 한 명 없이 뭐 했냐?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 

춘삼이는 이런 질문을 능숙하게 넘기는 능력이 없었다. 춘삼이가 대답을 찾느라 쩔쩔맬수록 그들은 막걸리를 더 권했다. 상대방에 따라 중간에 오고 간 말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춘삼이의 마지막 말은 한결같았다. "누나들을 소개해 주겠다. 편지를 쓰도록 하겠다" 그래야 그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니까. 


1시가 됐을 즈음 춘삼이의 소대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좀 전에 했던 말이고 혀는 꼬였고 눈은 작아졌다. 고참 병장 셋은 한쪽 귀퉁이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1시가 되기 전에 취침 준비를 마치고 암막도 쳤다. 어떤 병사는 얼굴이 빨간 사과처럼 붉어졌고 어떤 사람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1시가 되자 1소대장이 중대를 돌아다니며 외쳤다. "지금부터 모두 취침한다. 6시까지 이동은 없다. 알겠나?" 장병들의 대답은 있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다. 5중대는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잠자던 춘삼이가 벌떡 일어나 허둥대며 무언가를 찾았다. 상체를 한번 들썩이더니 입에 음식을 가득 물은 듯 양 볼이 터질 것 같았다. 잠시 뒤 한 번 더 어깨를 들썩하더니 침상 아래에 토사물을 쏟아냈다.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구토는 몇 차례 더 이어졌다. 눈 가에 난 눈물을 닦은 춘삼이는 양말로 토사물을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주위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춘삼이는 다시 누워 잠을 잤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이번에는 정 일병이 눈을 떴다. 화장실이 급한 듯했다. 내무반 한쪽 귀퉁이로 가던 그는 재빨리 물건을 꺼냈지만, 오줌을 잔뜩 머금은 물건은 조준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분수처럼 솟아 침상 위 어느 병사들의 얼굴과 입을 적셨다. 정일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빨리 손으로 물건을 바닥으로 조준했지만 오줌은 이미 다 나온 후였다. 남은 건 수도꼭지 잠근 후 떨어지는 물방울 정도의 양일 뿐이었다. 하필 분수가 되어 날아간 오줌이 떨어진 곳은 고참 상병부터 병장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곳이었다. 걱정이 태산처럼 커졌지만 다행히 아무도 깬 사람이 없었다. 고양이 발걸음으로 걸어 제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숨을 죽이며 다른 병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코를 고는 소리 외에 아무 기척도 없었다. 잠시 뒤 정일병은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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