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원래 소리 없이 시작된다. 아무도 모르게 대지를 적시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존재를 깨닫는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조용히 마음의 뒷골목을 거닐며, 이미 그 자리에 와 있었음을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할 뿐이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물은 우리에게 목적지도 방향도 묻지 않는다. 다만 강물은 묵묵히 흐르며 우리를 태우고, 때로는 급류처럼 우리를 무너뜨리며 흘러갈 뿐이다. 우리는 항해자이자 표류자이고, 지배자이자 피지배자인 채로 삶이라는 강 위에 존재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마다, 버리고 온 것들이 조용히 우리 뒤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지운 줄 알았던 기억들은, 버림받았다는 억울함에 언제든 다시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잃고 떠난 길 위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기 마련이다. 슬픔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기쁨보다 훨씬 더 자주 슬픔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지만, 슬픔은 또한 우리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때론 비가 그친 뒤 세상이 더욱 또렷해지듯, 슬픔의 뒤에도 언제나 명징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슬픔을 견디는 자만이 진정한 기쁨의 가치를 알 수 있듯, 슬픔은 기쁨의 그림자가 아니라 기쁨을 밝혀주는 어둠이다. 그러므로 슬픔이 우리를 덮칠 때마다 그것을 버거워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슬픔을 품은 채 그 무게를 사랑할 일이다.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것은 불가피한 삶의 조건이다. 우리는 늘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또한 타인에게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 상처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내면에 깊게 자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나아갈 길을 은은히 밝혀주는 빛이 된다.
그러니 삶이 슬픔이라는 이름의 비를 내린다면, 차라리 그 아래에서 춤을 추라. 비를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면, 기꺼이 그 비를 맞으며 슬픔 속에서 자유로워져라. 그것이 인간으로서 이 비의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방법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슬픔의 생태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미묘하고 섬세한지, 얼마나 가련하고 아름다운지.
이제, 우리는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그것이 삶이니까.
그것이 슬픔의 진정한 생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