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코로나란..
아이와 타자기의 이야기도, 핸드메이드 작가로서의 이야기도 한동안 쓸 수가 없었다. 코로나 사태가 나를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장 코로나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위기감 때문이 아니다. 코로나가 내게 준 최고의 고통은, 여행을 못 간다던지, 외출을 못한다던지, 사람들을 잘 못 만난다던지.. 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의 삼시 세 끼를 해 먹이는 것을 끝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이의 식사라서 더 그렇다. 어른의 식사를 챙기는 것은 어린이의 그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 어른이야 한두 끼 정도 굶거나 대강 라면 같은 것으로 때운다고 한들 큰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 성장해야 하는 아이의 식사는 건너 뒤거나 대강 때울 수가 없다. 한 끼를 밀가루 베이스 음식을 먹었으면, 다음 끼니에는 밥을 먹이려고 애를 쓰고 이왕이면 매 식사마다 고기와 야채 모두를 골고루 먹이기 위해 신경 써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다음 날엔 되도록 그 전날의 식단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나도 아이도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아이가 주 3회 등교를 하며 급식도 먹고 온,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내게 주어진 자유 덕분에 무척이나 행복했다. 내가 반긴 것은 자유로운 '시간'이 아니라, 점심을 대강 때울 '선택'의 자유였다. 그래서 더 보란 듯이 매 끼니를 짜파게티, 라면, 이런저런 인스턴트를 먹거나 과일이나 커피 과자 같은 것으로 대강 먹었다. 대강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앞에 두고 제대로 챙겨 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어떤 날은 밥이 먹고 싶은대도 일부러 냉동 피자를 데워먹기도 했다.자유를 누리겠다는 의지가 '건강'을 압도한 순간이었다.
다시 사태가 심각해지고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 발표가 나자 나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아 나의 소중한 불량 점심도 이제 끝이구나'싶어서였다. 물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있는 환자들이나 그들을 위해 애쓰고 계신 의료인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나의 불량 점심 따위 투정에 불과하지 않다. 하지만 투정에 불과하니 더 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입 닥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작고 다르고 사소하고 애매하고 미묘한 감정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이곳에 올라오는 글들의 90% 정도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세상은 얼마나 가난한지. 그러니 점심 가지고 투정을 부린다고 욕먹어도 좋으니 나라도 이제 솔직히 말해야겠다. 지금의 사태가 싫은 이유야 끝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나는 요리를 끝없이 해야 해서, 그래서 코로나가 싫다고.
아마 많은 엄마들이 공감할 것이다. 특히, 어차피 외출도 잘 안 하고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 같은 집순이 엄마에게 코로나란, 질병으로서의 위협보다는 매 끼니를 다시 요리하고 챙겨서 먹여야 한다는 피로감으로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가 온라인 수업하기 전에 또는(내가 늦잠을 잔 날은) 끝난 직후에 아침을 만들어주고, 몇 시간 후엔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아무거나 뭐? 떡국?' '아니 떡국 말고 아무거나'로 이어지는 지루하고 뻔하고 짜증 나는 대화를 거쳐서 겨우겨우 점심 메뉴를 결정할 것이며, 점심을 먹고 치우고 나면 아이는 간식을 달라고 할 것이며, 그 후엔 또다시 그 지루하고 뻔한 대화를 거쳐 저녁 메뉴를 정하고 또 저녁을 해 먹고, 아이가 잠든 밤이면 내일 먹을 것은 있나 냉장고를 열어서 확인해보고, 결국 또 핸드폰으로 장을 보고... 여기까지도 이미 마음과 몸이 다 소진될 만큼 지치고 피곤한데,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을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지루한 회전목마를 탄 기분이다. 나의 의지로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내릴 수도 없는 그런 회전목마.(그런데 보이는 풍경마저도 황량하고 지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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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이에게 '점심으로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보려다가, 그 질문 자체가 너무 지겨워서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재료를 이리저리 확인해보다가, 내가 메뉴를 결정해버렸다. '라자냐_!"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는 예상대로 투덜거렸다. 나 라자냐 싫은데... 라며. 못 들은 척 아이에게도 앞치마를 입히고 나도 앞치마를 두르고, 진지하고 열심히 한 시간 동안 라자냐를 만들었다. 아이는 라구 소스를 담당하고 나는 베샤멜소스를 만들었다. 라자냐를 쌓아 올릴 때 아이가 치즈를 필요 이상으로 듬뿍 뿌렸지만 나도 필요 이상으로 베샤멜소스를 듬뿍 넣었으니 서로 쌤쌤이다 봐주기로 했다. 덕분에 라자냐는 거대해졌고, 오븐에서 10-20분 정도 구우면 되는 것을 40분은 구워야 했고, 드디어 완성한 라자냐를 식탁 위에 올렸을 때엔 이미 오후 네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점심인가 저녁인가?! 그냥 점 저라고 부르자 점저. 뜨거운 김이 나는 라자냐를 조금씩 잘라서 각자의 그릇에 올려놓고 맛있게 먹었다. 이따 저녁은 언제 먹나. 그래 뭐 아홉 시쯤 먹지 뭐. 생각해보면 초조할 것이 하나도 없다. 내일 아침 일찍 학교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학원이야 몇 개월 전에 다 끊어버렸으니 지켜야 하는 일정 같은 것도 없다. 다 먹고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다섯 시이다. 그리고 내 안에 쌓여있던 짜증과 지루함도 어느새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뜨거운 오후 햇살의 고비를 넘긴 것이다.
세 끼니를 다 해먹어야하는 피로감이 어째서 아이와 오후 네시에 라자냐를 만들어 먹은 것으로 해소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갑자기 그동안 누적된 요리의 피로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요리하기 싫어서 쌓인 피로도가, 오히려 까다로운 음식을 만들면서 해소가 되다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요상하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요리라는 노동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양을 넘어서면 미치거나 아니면 오히려 해소가 되거나 그 둘 중 하나인 것일까. 어쨌든 지금은 후자 쪽이라서 다행이다. 물론 모를 일이다. 이러다가 다시 누적의 누적을 반복한 끝에 미쳐버릴지도. 그러면 어떻게 될까. 주방을 닫아버리고, 배달앱 의존도 100%가 되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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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나의 마음이 점저로 먹은 라자냐 덕분에 한결 가벼워졌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지만, 굳이 이해를 하자면, 아마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이 상황들 속에서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더 정확히는, 지금 이 상황들 '덕분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오후 네시에 점심을 먹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세수 한 번 하지 않고 잠옷만 입고 있는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좀 못난 생각이지만-'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 가서 뭘 하고 놀까?' 같은 초조함 (날씨가 좋은데 나만 집에 있으면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을 가질 이유도 없다. 다들 집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고양이는 우리가 집에 없어도 잘 지내겠지? 하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늘 집에 있기 때문이다. 장소가 한정적이니 시간은 오히려 무한해지는 기분이다. 그것을 오히려 즐기자. 까다로운 요리를 하고 점심이든 저녁이든 상관없이 배고플 때 먹자. 아침에 일어난 상태 그대로 밤에 꼬질꼬질하게 잠들어보자. 이렇게 지내보니 화장이라는 것은 남들 눈을 위해 하는 거였구나. 내가 그동안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집에서 놀기는 우리가 전문 가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집순이의 능력을 보여주자..
버나드 쇼의 말처럼, '삶은 원래 쉽지 않아-하지만 용기를 내면,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삶은 그 안에서도 즐거울 수 있지.'. 물론 나도 안다. 이런 마음이 며칠 후에는 또다시 닳아 없어지리라는 것을. 그러다가 어느 날 또 어떤 것을 계기로 '아하!'하고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좋아할 것이다. 바보처럼 그 과정을 반복해도 좋으니, 그 깨달음들이 좋은 타이밍에 나를 찾아와 주기를, 이왕이면 자주. 그렇게 한고비 한고비를 불만과 해소와 깨달음과 아이와의 막춤과 고양이와 담요와 넷플릭스와 책과 라자냐로 이겨 나가다 보면 분명 다시 그 날들이 와줄 것이다. 밥을 대강 먹을 수 있는 자유의 날들이. 나는 오로지 나의 배고픔만 책임져도 되는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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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나저나, 아이가 주 5회 학교를 가고, 오후 2-3시에 하교하면 바로 학원을 가서 저녁때나 집에 돌아오던 날들은 실화였을까요? 수십 년 전의 날들, 아니 전생에 일어났던 일들처럼 아득하네요. 그때의 난 왜 이 세상을 정복하지 못했지? 의아할 뿐입니다. 지금 같아선 내게 그러한 시간들이 주어진다면, 나는 책을 한 열 권 정도는 쓰고, 돈도 많이 모으고, 세계 여행을 두세 번은 족히 다녀왔을 것 같아요. 아 그리운 날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