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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Sep 26. 2020

나의 막춤을

너는 창피해했지


 내게는 집에서 오분 거리에 위치한 작업실이 있다. 지하지만 햇빛이 제법 잘 들어오고, 작업실 바로 앞에는 천이 흐르는 , 나도 아이도 아끼는 공간이다.


 동네 산책을 나섰다가 이유 없이 작업실에 들리는 것이 우리의 취미이다. '작업실 가자!'는 목적을 인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닌 척하면서, 정처 없이 동네를 산책하다가 '엇?! 어느새 작업실 앞이네? '하면서 슬그머니 작업실로 들어간다.

  그러면 마치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처럼 반갑고 새롭다.


 정작 작업실에서는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 '작업실'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아티스틱하고 터프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같이 해야만 할거 같은데 ,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이는 주로 작업 테이블에 앉아 만화를 그리고, 나는 소파에 푹 파묻혀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아이는 싫어하겠지만, 내가 작업실에만 오면 꼭 챙기는 나만의 즐거움이 있다. 그건 바로 춤추기. 그냥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서 준비가 좀 필요하다.


1. 음악을 크게 튼다.

2. 문을 활짝 연다.

3. 잠시 오늘은 어떤 막춤을 출 것인지 고민한다.

4. 나의 뻔뻔한 페르소나를 꺼낸다.

5. 막춤을 춘다.


 작업실의 구조상 계단과 이어지는 작업실 문 앞은 어느 정도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거기서 굳이 , 아이를 바라보며 , 내가 출 수 있는 가장 민망한 춤을 신나게 춘다. 작년에만 해도 아이는 춤을 추는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춤을 추는 나에게도 같이 웃어주는 아이에게도 , 쌓인 것들이 해소가 되는 귀한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십 대에 접어든 올해부터는 대놓고 난감해한다.


"엄마!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얼른 들어와!"


 창피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재촉한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그게 또 너무 재밌어서 멈출 수가 없다.


" 누가 보면 좀 어때. 내가 즐거우면 그만인걸. 너는 내가 그렇게도 창피하더냐!"


 아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일부로 능글능글 거리며 놀리듯이 대답하며 열심히 춤을 춘다. 그러면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포기한다. 아이의 머리 위로 '우리 엄마 못 말려'라고 적힌 구름이 떠다닌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는 치명적인 말솜씨로 나의 '작업실 앞 막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날따라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운전을 하며 창문을 내리고 음악을 크게 틀고 신나게 따라 부르고 있는데 딸이 얼른 창문을 올리라며 핀잔을 주는 것이다.


"아니 누구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따라 부르는 건데 왜 그리 난리야"


" 누가 지나가다가 듣거나 우릴 보면 어떡해. 여긴 우리 학교 근처라서 내 친구가 볼 수도 있단 말이야"


"아니 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고 고민인 거야? 그런 거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쿨하게 대답하고 다시 노래를 따라 부르려는데

아이가 결정적인 말을 하고 말았다. (듣지 않았으면 내 막춤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듣고 말았고!)


" 엄마. 엄마는 나이가 나보다 한참 많잖아. 그래서 이제 그런 게 신경 안 쓰이나 보지. 그런데 엄마도 분명 초등학생 때는 친구가 하는 말이나 생각이 신경 쓰이고 그랬을 거 아냐. 나는 지금 그렇단 말이야. 엄마랑 나랑은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너무 맞는 말이라서 음악도 내 목소리도 쏙 들어갔다.

-


 열 살 즈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코가 너무 못났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내게는 큰 콤플렉스였다.

 친구가 쳐다보면 '어머  코가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해' 라며 바로 코를 가렸고 , 신문지에서 '코가 높아지는 알약'광고를 보고 어떻게 하면 돈을 모아서  약을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심지어  약을 주문한 후에 어떻게 하면 엄마 아빠 몰래 숨길  있을까 -제법 그럴싸한 계획까지 세웠었다.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의 역할이 과하게 중요했던 그런 계획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내 친구들은 아무도 나의 코 모양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과거 사진을 보면 내 코가 그렇게 못나지도 않았다. 그냥 이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코였다.

 

 엄마에게 '내 코가 너무 낮고 못생겼어'라고 투정을 부리면 엄마가 ' 뭘 그리 외모에 신경 쓰니. 다들 네 코만 보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런 쿨내 나는 대답만 하셨었다.

 잊고 살았는데, 내 눈에는 너무 못난 내 코와 엄마의 무심한 대답이 떠오르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이 순식간에 기억이 났다.


'힝 엄마는 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에게는 좋은 화장품 향과 부드러운 잠옷과 어른들의 매끄러운 세계가 있었고 내게는 아이들로 가득 찬 교실과 점심시간엔 피구를 하며 놀까 고무줄을 하며 놀까 사소한 고민을 하루에도 수십 번을 해야 하는 바쁘고 번잡한 세계가 있었다.

 어릴 때에도 엄마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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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같은 것에 집중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는 고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냈던 것 같다.


 아이는 내가 아니다. 아이는 나와는 다른,  자체로 독립적인 인격체이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다. 우리는 서로 삶의 다른 지점을 살아가고 있다. 아이는 내가 완성해야 하는 미완성 프로젝트가 아니다. 이미  자체로 완성된 나와는 전혀 다른 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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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보면 사소한 대화에서 참으로 거창한 결론을 내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내가 자주 그래요. 사소한 것에서 큰 것을 찾아내어서 의미 부여하고 북 치고 장구치고 다해요. 그리고 사실 그러한 거창한 결론의 순간들을 좋아해요.

 

 그런데 작은 것에 의미 부여해서 혼자 감동받고 깨닫고 반성하고, 수년 후에는 그 의미부여의 촌스러움을 깨닫고 기가 막혀하고 , 또 수정하면서. 그래야지 덜컹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잘 굴러가는 것이 아이를 키우는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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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den family

미드 '모던 패밀리'에서 , 세 아이의 엄마인 클레어가 이런 말을 한다.


"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달로 로켓을 발사는 것과 같아요. 처음엔 둘이 딱 붙어서 정말 가깝게 지내다가 어느 날 로켓이 발사되죠. 십 대가 되고 난 후 어느 날, 달의 어두운 쪽으로 사라지고 말아요. 그때부터 엄마가 할 수 일이란 로켓이 다시 돌아오는 희미한 신호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죠"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달의 dark side 란 , 어두운 사춘기 시기를 말한다. 아이는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자기만의 것, 자기라는 사람을 찾으러 저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고 부모에게서 독립한 한 인격체가 된 어느 날, 엄마 아빠라는 사람이 다시 궁금해지고 그리워져서 지구로 돌아온다.

 어두운 우주로 발사되어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첫째 딸(헤일리)이 엄마와 둘이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클레어는 설레어하면서 말한다.


 " 그런데 드디어 헤일리가 그 신호를 보내는 거 같아요"


 물론, 내 아이의 요청들을 벌써 달의 저쪽으로 떠나려는 징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로켓이 자신의 발사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고, 또는 엄마와 자신을 분리하는 단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로켓은 발사되라고 만들어진 것처럼, 아이는 언젠가는 자기의 세계를 찾기 위해 나의 품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때 내가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일이다. 언젠가의 내가 떠났다가 다시 엄마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 엄마도 어두운 우주로 떠난 나를 하염없이 기다린 날들이 있었겠지.


 엄마로서 내린 결론은 거창하였으나, 사실 내가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행동은 간단하다.


앞으로는, 아무리 재밌어도 아이를 창피하게 하는 막춤은 추지 않는다. (대신, 아이가 없을 땐 마음껏 춘다.) 그리고 차 창문을 열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지 않는다.


 이렇게 슬슬 시동을 걸다가 정말 아득하게 먼 우주로 떠나고 나면, 조바심 내지 말고 혼자 막춤을 추면서 기다려야지. 돌아온 아이가 정말 깔깔 신나게 웃을 수 있도록 최고로 민망한 춤으로 연습해둬야지.


아.. 크게 노래 틀지 말라는 열 살 딸의 말 한마디에 이토록 오버하는 엄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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