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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글쓰기 Jan 09. 2024

딸의 이름이 족보에 올라간  순간

“아빠 우리 집 족보는 어디 있어?”

큰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안 족보에 대해 알아 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아버지가 1985년 뇌진탕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족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6.25 때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면서 가지고 내려오지 못했다. 대부분 피난민 가족은 마찬가지이지만 아버지께서 조부, 증조부, 고조부가 어떤 분이었다고 가끔 말씀만 해 주었을 뿐. 족보가 없어 난감했다.


다니던 회사가 남산도서관에서 가까웠다. 1987년에는 국립 도서관인 남산도서관 6층에 족보가 보존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주민 통제 수단으로 전 국민이 족보를 만들어 조선총독부에 보관시켰다고 한다. 이 자료가 국립도서관이었던 남산 도서관에 남아 있다. 지금은  국립도서관이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매일 족보를 찾기 위해 남산 도서관에 갔다. 경주 이 씨 평리공파란 사실 밖에 몰랐다. 경주 이 씨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분파가 많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 당시 도서관에는 유물이나 고서를 감정해 주고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내놓고 일을 못 해 공식적인 수수료도 없을 때였다.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감정사는 친절하게 찾아주기 시작했다. 족보가 디지털 자료로 정리 안되었을 때였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1987년 2월 18일 전날 밤에 족보 찾는 꿈까지 꾸었다.  족보를 찾기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나던 날 감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치 한강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일인데 운이 정말 좋습니다.”라고. 마치 ‘구름 위로 두둥실 떠가는 느낌’이었다.


최선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드디어 나에 대한 정체성을 찾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가족 모두 족보를 찾았다고 좋아했다. 그동안 족보에 못 올린 가족 명단을 작성하여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경주 이 씨 화수회’에 등록하였다. 친척들 고향이 대부분 개성이었는데 ‘개성 경주 이 씨 종친회’와 연락되었다. 모두 20촌 안에 들어가는 친척들이었다. 얼굴 모양새도 비슷했다. 종친들이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마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조상들의 흔적을 얘기하고 후손들에게 자부심을 북돋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족보가 없으면 상놈으로 취급받아 노예처럼 팔려 다녔기 때문에 족보는 중요했다. 이조 말경에는 돈이 생긴 머슴들이 명문 성인 ‘권 씨 한 씨’ 등을 사서 족보를 만들었다고 하는 데 그만큼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산소 위치도 적혀있었으나 이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다. 큰 벼슬한 조상은 자세하게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지만 딸들은 기록조차 없었다. 아들이 없는 나는 아쉬웠다. 종친들이 여자는 안 된다고 반대했으나 족보를 찾은 공로로 딸들도 족보에 올릴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딸들에게 자기 이름이 나온 족보를 보여 주며 자부심을 느끼도록 했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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