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한 유력 정치인의 행태를 쭉 지켜보며, 소환하고 싶은 캐릭터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이문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주인공 엄석대다. 1987년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해에 발표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50년대 말 시골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와 권력과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일종의 우화다. 발표 직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나중엔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원작자가 이문열이라고 해서 굳이 색안경을 쓰고 볼 필요는 없다. 이문열은 진보세력을 극혐하는 보수논객의 인상이 강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한때는 진영에 관계 없이 전국민적인 관심과 갈채를 받던 국민작가였다. 이 작품은 그때 썼다. 그의 보수주의적인 색깔이 그때라고 없었겠냐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주제나 캐릭터의 상징성은 선명해보인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어떤 문제적 정치인을 엄석대와 연결시킨 칼럼과 동영상이 더러 있다. 이들을 보며 격화소양(隔靴搔痒) 즉 신발 신고 가려운 데를 긁은 것 같이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오래 전 건성으로 읽어서 이야기 선이 가물가물하기는 했지만, 이들 칼럼과 동영상에서 소개한 주제와 내가 어렴풋하게 이해한 이 소설의 주제가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의구심이 생겨서였다.
그래서 근 30년 만에 다시 그 소설을 집어 들었고, 소득이 있었다. 술수와 부정한 짓으로 절대 권력을 누리다가 마침내 들통 나서 결국 개쪽 당하고 말았다는 식으로, 단순히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 따위의 전근대적 윤리의 담론으로만 그 소설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내가 이해한 이 소설은 주인공 엄석대로 상징되는 절대 권력자의 횡포와 몰락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점점 권력의 단맛에 취해가는, 그러다가 판이 바뀌었다 싶은 순간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추종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용 시작)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종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으나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석대가 원해서 그랬는지, 내가 자청해서 그랬는지 조차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을 만큼 강요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짐작으로 그의 왕국에 안주한 한 신민(臣民)으로 자발적으로 바친 조세가 부역에 가까운 것인 성싶다.(인용 끝)
이처럼 이 소설의 화자는 우여곡절 끝에 자발적인 순응과 굴종을 통해 왕국의 신민으로 안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데 절대적으로 만족했다. 일종의 노예근성이랄 수 있는 그 자세가 자유와 합리보다 더 달콤한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 '복종'에 나오는 한 구절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한시적 복종과 종교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무한한 복종은 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다.
그때가 아직 1950년대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 훈련을 받지 않았거나 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느 시기라도 그런 성정을 가질 수 있다. 그 유력 정치인이 불공정과 편파의 의혹을 받고 있는 데다가 정치인으로서도 함량 미달의 역량을 거듭해서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지지가 아직 높은 이유도 여기서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새 학년 담임 교체에 따라 공정과 자유와 자율의 가치를 존중하는 김 선생의 부임과 함께 엄석대의 전횡과 비리가 밝혀지면서 이 소설은 극적인 반전을 맞이한다. 엄석대라는 절대 권력은 대리시험의 부정행위가 밝혀지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인용 시작)“엄석대, 여기를 잘 봐. 여기 이름 쓴 데 지우개 자국이 보이지?”
그제서야 나는 담임 선생님이 드디어 석대의 비밀을 눈치챘음을 알았다. 그러자 문득 석대를 향한 동정이나 근심보다는 일의 결말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석대가 그 전 라이터 사건 때처럼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고 아이들도 그때처럼 입을 모아 그를 뒷받침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중략)
“잘못...... 했습니다.”(인용 끝)
이렇게 엄석대는 결국 진실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새로 부임한 김 선생에 의해 엄석대라는 절대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보여준 동료들의 비겁한 행태다.
(인용 시작) 석대의 나쁜 짓을 까발리고 들춰내는 데 가장 열성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은 대개 두 부류였다. 하나는 간절히 석대의 총애를 받기 원했으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끝내는 실패한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그날 아침까지도 석대 곁에 붙어 그 숱한 나쁜 짓에 그의 손발 노릇을 하던 부류였다. 내 눈에는 그 애들이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 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인용 끝)
측근이 되는 데 성공했든 실패했든, 절대 권력의 총애를 열망했던 추종자들이 오히려 그 절대 권력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며 우리는 그 유력 정치인에 대한 지지가 매우 허약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그를 지지하거나 그에게 빌붙었던 추종자들은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 즉시 등을 돌릴 수도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한 지지는 하루아침에 거품처럼 푹 꺼질 수도 있겠다.
그 유력 정치인에게 '김 선생'은 누구(무엇)일까? 그리고 언제 어떻게 찾아올까? 아니 찾아오기는 할까? 그의 '김 선생'은 소설에서처럼 국가의 공식적 제도(소설의 경우 신학기 담임교체)에 의해서나 부당한 권력을 순식간에 몰락시킬 만큼 정당성을 확보한 권력 관계(소설의 경우 담임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통해서 찾아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김 선생’은 점점 조여들어가는 가족 및 측근에 대한 수사망에 대어가 낚이면서, 아니면 거듭되는 망언이 쌓여 수습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서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 어느날 갑자기 훅 찾아올 수도 있다. 그때 그의 추종자들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까.
이문열은 이 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유며 평등이며 대의민주제와 같은 서구적 근대의 가치가 과연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하기야 귀족주의자이자 근왕주의자이며 봉건왕조의 전통을 찬미하는 복고주의자인 이문열다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지금까지 긴 울림을 들려주는 이유는 그 질문이 서구적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