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배반한 근대』에는 카프카의 <소송>에 관한 평론이 "카프카, 근대를 조롱하다"라는 이름으로 실려있다. 프란츠 카프카라는 대가의 작품을 내 목소리로 정색해서 언급하는 일은 나에겐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나는 독일 문학사에도 문외한이고 다른 카프카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석사과정에서 비평 이론을 공부했고, 다른 평론가의 글을 열심히 읽어보기는 했다. 광고비평이나 문화비평은 써봤다. 하지만 유명한 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평론을 쓴 건 내 인생에서 처음인 듯하다.
그런데 <소송>에 대해서만큼은 근대 비판이라는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뭔가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고 그래서 순식간에 썼다. 문학평론가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는 독특한 시각이라며 격려해주었다. 그래서 자신감을 얻고 과감하게 실었다. 그 글에서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대목을 소개한다.
카프카의 <소송> 전편에 흐르는 정서는 느닷없음, 난데없음, 생뚱맞음이다. 그렇듯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근엄한 표정과 정중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개입으로 느닷없이, 난데없이, 생뚱맞게 연이어 벌어진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 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다." 너무나 유명한 이 첫 문장에서부터 '느닷없이'라는 단어는 단연 눈길을 끈다.
이 소설 독해의 키포인트는 한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한 인물의 세부적인 언행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개별 사건과 인물이 아니라 그 관계다. 사건과 사건은 인과관계로 연결되지 않고, 인물과 사물 또는 인물과 행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접속되며, 사건과 장소의 매칭은 거듭해서 기대를 배반한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제는 그 관계들이 끊임없이 어긋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은 이른바 ‘텅 빈 기표’로서, 불합리·비논리·소통 불능의 현상을 말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K는 그 구도 속으로 끌려가고 소송은 그가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K는 체포되었지만 직장인 은행에 출근할 수 있었다”라는 에피소드에서는 체포라는 사건과 출근이라는 사건이 난데없이 연결되어 있다. 강제 구금을 뜻하는 체포와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말해주는 출근은 합리적인 수준에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예심판사가 읽었던 것은 재판 관련 서류가 아니라 음란소설이었다”라는 에피소드에서는 인물과 사물이, “K의 법률 자문을 맡아준 사람은 재판관의 초상화가였다”라는 에피소드에서는 인물과 행위가 아무런 배경 설명이나 전제조건 없이 관련을 맺고 있다. 즉 판사와 음란소설, 초상화가와 법률 자문이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요소가 느닷없이 접속되어 있다. 이 역시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재판이 전혀 뜻밖의 시간에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열렸다는 에피소드에서는 사건과 장소가 생뚱맞게 매칭되어 있다. 창고로도 보이고 아파트로도 보이는 정체불명의 외딴 건물에서, 그것도 모든 공식적 업무가 멈추는 일요일에 공개재판이 열린다는 건 상식의 수준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생뚱맞은 일이다. 『소송』은 이런 어긋남들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