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와 아이히만의 평행이론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by 까칠한 서생

이재명 체포 동의안 가결이라는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지던 시간에, 나는 <오펜하이머>를 봤다. 세 겹의 시간이 중첩되면서 사건이 진행되는 특이한 구성의 영화였다. 박진감과 지루함을 동시에 느꼈다. 다음 장면을 기대하면서도 의자 밑으로 시계를 보는 묘한 경험을 했다. 생각해보니 요즘 정치 현실에도 여러 겹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고, 박진감과 지루함이 동시에 펼쳐진다. 현실이 영화같은 겐지, 영화가 현실 같은 겐지.


이상한 것은 영화를 보면 볼수록 오펜하이머가 아이히만과 겹쳐 보였다는 점. 아이히만은 유대인수송을 완벽하게 책임졌고, 오펜하이머는 핵폭탄개발을 완벽하게 책임졌다. 아이히만의 성과는 600만 대학살(홀로코스트)을 가능하게 했고, 오펜하이머의 성과는 수십만 명의 원폭 사망자를 낳았다.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드는 건 과학자지만 사용하는 건 정치인"이라고 한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오펜하이머는 연구소의 책임자로서 목표를 충실히 달성했을 뿐이라고 항변했고, 아이히만은 수송 책임자로서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며 면책을 호소했다.

법정에서 진술하는 아돌프 아이히만



하지만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규정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의 주인공으로 악의 수행자가 되었고, 오펜하이머는 타임지 표지로도 등장하는 등 전쟁을 빨리 끝낸 주인공으로 평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충실한 하수인이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악마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영웅이 된 이 기묘한 아이러니 (패러덕스?). 그들의 운명을 선과 악으로 가른 기준은 승자와 패자라는 결과론이었는데 이는 결국 힘(권력)의 논리였을 것 같다.


영화가 vod로 넘어오면 다시 면밀히 살펴봐야겠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다시 제대로 읽어야겠다.10월중순 마감으로 청탁받은 글이 있지만, 거기에는 일정이 빠듯해서 이 내용을 담기 어려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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