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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13. 2023

쓰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신영복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출판사 제공


고 신영복 선생님의 옥중 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스무 살, 대학 선배의 추천으로 처음 만났다. 단정한 문장과 풍부한 식견에 매료되었고, 절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갈고닦는 한 인간의 고아한 기상에 감탄했다. 그 후 누가 ‘인생 책’을 물으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꼽았고, <더불어숲>, <나무야 나무야>, <강의>까지 내처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 20년 무기수의 심정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었을까 싶고, 그저 지적 허영심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도 들지만, 그래도 좋은 책이 주는 묵직한 감동은 느낄 수 있었다.


서른둘, 엄마가 되었다.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았던 나는 하루아침에 집 안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집이 감옥처럼 느껴졌을 때, 한 개인으로서 자유와 인권을 박탈당했다고 느껴졌을 때 자주, 감히 신영복 선생님을 떠올렸다. 감옥도 대학이 될 수 있다면 육아는 왜 아니란 말인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중요한 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것’이라 떠들던 나, 내 시간, 내 계획, 성취로 똘똘 뭉쳐있던 지난날을 통렬히 반성했다. 이 시간을 잘 통과하면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찰랑찰랑 어느 그릇에나 모양대로 담기는 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루기 어려운 소망도 품었다.


마흔하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기자단 9월의 책으로 지난 몇 주간 틈틈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읽었다. 책을 펼 때마다 청량한 샘물이 조금씩 마음속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담론>은 처음이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무려 20년 만의 재독이다.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에 계신 세월만큼 지나 다시 이 책을 손에 드니 감회가 새롭다. 밑줄을 그은 문장이야 셀 수 없이 많지만, 올해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어서인지 유독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다.


밤중에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청구회 추억을 또박또박 휴지에 적고 있는 동안만은 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청구회 추억은 그 절망의 작은 창문이었습니다.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오는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담론, 217~218쪽)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글쓰기에는 어떤 힘이 있는 걸까. 그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 이상이었다. 절망 속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는 창문이었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구원의 경험이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보낸 230여 편의 편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비록 교도관의 감시와 국가의 검열 속에 쓰였다 하더라도 수신자의 구체적인 얼굴을 떠올리면서 쓴 편지는 기약 없는 수감생활을 견디게 하는 힘이고, 깨어있겠다는 다짐이며,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작은 엽서에 철필로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두 번째로 가족에게, 출간 후 수많은 독자에게 다가와 공명했다. 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나의 글쓰기를 돌아본다. 읽는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쓰는 사람이 된 지 2년 반이 되었다. 이제껏 나에게 글쓰기는 일상의 소중한 것들, 나를 흔들어 놓았던 장면들, 붙잡고 싶은 순간들을 기록하는 의미였다. 글을 쓰면서 삶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정성껏 감응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뭔가가 부족했다.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40쪽).” 이 문장에 나를 비춰보고 내 글쓰기에 무엇이 빠져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신영복 선생님께 글쓰기는 생을 붙드는 의미이자 실천이었는데 내 글쓰기는 오직 나를 향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독백이나 되돌아오는 메아리 말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같은 글이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그러려면 선 자리가 달라져야 하는데, 글은 삶에서 나오는데, 아직은 안온한 일상을 찢고 나올 용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십 년 만에 다시 읽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솔직한 모습을 직면하게 하고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나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타인에게 시선을 돌리기. 마음 열고 관계 맺기.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다시 세월이 지나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는 지금보다는 덜 부끄럽기를.



20년만에 재독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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