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가 끝나서

나만의 완전 범죄

by 보르도대감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말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보르도 처음 와서 그 넓은 포도밭에 한 번 감동 먹고 포도맛에 감탄을 한다. 이 지역에 재배하는 포도는 와인 양조용이지 식용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못 먹는 것 또한 아니다. 단지 식용 포도와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식용으로 먹는 것보다 와인 양조용으로 사용을 하는 것이 더 부가가치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수확시기에는 차 타고 지나가면서 포도나무에 열려있는 포도맛을 보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물론, 그런 행위가 정당하거나 합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한 두 알 맛을 보는 것까지 인심이 야박하지는 않다. 아마도 직접 눈으로 보면 한국에서 재배되는 포도와 달라서 더 호기심을 자극하고 어떤 맛인지 먹어보고 싶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겁 없던 10년 전 이야기를 해보자.

보르도는 9월부터 포도 수확을 시작한다. 9월 초순 혹은 중순,, 정확한 시기는 해마다 날씨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는 있다. 보르도를 조금 벗어나서 차를 타고 달리면 온 사방이 포도밭이다. 그리고 맛있게 익어가는 포도가 포도나무에 덜렁덜렁 달려져 있다. 까무잡잡하고 탱글탱글.

한 접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알 따먹어봤더니 포도 알맹이가 톡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포도껍질 하고 같이 씹어먹어도 꽤나 달달한 맛을 낸다.

차를 세워놓고 먹어봐야 얼마큼 먹겠는가? 그냥 호기심에 몇 알 따먹어보고 '아~이런 맛이구나' 하는 정도지.

medoc marathon 006.JPG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포도를 따가서 잼을 한 번 만들어볼까? 억지로 조금은 정감 있게 표현하자면 '포도 서리'고 현실적인 단어로는 '포도 절도'가 맞을 것이다. 잼을 만들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량은 돼야 만들지 않을까! 포도나무에서 한 송이를 따려고 해 봤지만 가지가 질겨서 포도송이가 나무에서 잘 떨어지질 않는다.

처음부터 포도 서리를 할 생각이 아니었으면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오기로 포도를 따다가 꼭 잼을 만들어먹고 싶었다. 그냥 마트 가서 잼 사다 먹으면 될 걸,, 이라는 재미없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음날 집에서 가위 하고 검은색 비닐봉지를 준비해서 다시 범죄의 현장을 살펴보았다. 가위는 질기 포도송이를 줄기채 잘라야 하니깐 갖고 왔고 비닐봉지를 검은색으로 준비한 것은 내 나름대로 최대한 훔친 포도를 덜 들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포도밭에 도착을 해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고 포도밭은 어제와 똑같이 포도들만 햇볕에 잘 익어가고 있었다. 아,, 떨린다. 만약 내가 지금 하는 이 짓거리 누군가에게 발각이 된다면 지역 신문에 나올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인 보르도에서 포도 훔치다 체포' 대충 이 정도의 기사 제목으로 뜨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을 하면서 가져온 가위 칼날은 포도나무 줄기를 베기 시작했다. 줄기가 좀 두꺼운 애들은 나일론 빨랫줄처럼이나 질겼다. 마치 조금 덜 익은 돼지 갈지를 자를 때처럼 단칼에 베어지지가 않았다.


포도송이를 자르고 그걸 검은색 봉투에 넣고 하는 과정을 시간으로 쟀으면 40초도 안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 감각이 없는 그때 포도송이 줄기와의 격투는 권투경기 한 라운드 정도는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제 내 방식대로 납치한 포도를 차에 싣고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오는 내내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고, 사진 찍힌 것 같기도 하고, 왠진 목격자가 있을 것 같은 불안과 초초한 마음으로 운전을 했다.

10월14일 메독 포도수확 086.JPG

집에 와서 납치해온 포도를 보니 뿌듯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빨리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 포도를 잼을 만들어야 한다. 내 나름대로는 완전 범죄를 차근차근 진행했다.

10월14일 메독 포도수확 088.JPG
10월14일 메독 포도수확 091.JPG

포도에 QR코드가 찍혀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설탕을 넣어서 증거 인멸까지 완전하게 끝을 냈다.

작은 불에 서서히 끓이니깐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나무 주걱으로 살살 저어가며 내가 오늘 무슨 짓을 한 거지?라고 반성도 하면서 이런 범죄는 한 번으로 충분하니깐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도 했다.

10월14일 메독 포도수확 096.JPG

아무리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하지만 저 포도를 어느 포도밭에서 갖고 왔는지는 못 밝힌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가져온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다면 시중가로 못돼도 800만 원 이상은 할 것이다.


앗,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 잼을 만들어놓고 발라먹을 빵을 안 사 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보르도 최초의 역 카드깡 돈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