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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양파씨 Nov 20. 2019

학습된 노예근성

스스로 존경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나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코끼리 신드롬


영어로는 baby elephant syndrome / circus elephant syndrome 이라고 부른다. 아기 코끼리를 나무에 묶어두면 탈출을 하려 시도하지만 힘이 부족해 실패하고, 이 코끼리가 자라 어른이 되면 엄청한 힘을 가졌음에도 어렸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슬(끈)을 끊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의전 의전 의전


나는 여자지만 생각보다 일찍이 의전이란 것을 접하게 될 기회가 있었다.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외국 정상을 위한 민간 의전관으로 근무하면서부터이다. 단 이틀의 정상회의 기간 해외 정상의 방한 일정을 오차 없이 수행하기 위해 3~4달간 외교부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국기 배치법부터 정상들의 단체사진을 찍는 규칙까지 내게 다소 생소했던 엄격한 정상급 의전 룰을 익혔다. 당시에는 꽤 군기가 바싹 들어서 야근도 자주 하고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그래도 많은 걸 새로 배우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경험한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네는 어려서 유교의 삼강오륜을 가정과 학교에서 배우고, 커서는 사회에서 "의전"을 배운다. 장유유서의 도리를 모르면 배워먹지 못한 놈 취급을 받듯이, 의전을 제대로 못하면 제아무리 일을 잘해도 흔히 사회에서 일 못하고 개념 없는 놈! 이 된다. 외교부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의전관과 경호관들에게 의전을 몸소 익힌 터라, 나는 한 번도 내가 의전 개념이 없다곤 믿지 않았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대통령이 없는 곳에서도 이 의전이란 개념이 통용된다는 걸 몰랐다.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나보다 상사가 있는 곳이면 의전을 행해야 했다. 소위 생활 의전이다.


생활 의전은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사회생활 전반에 퍼져있었다. 이를테면 회식 자리에서 상사를 상석으로 지체 없이 안내하고(더불어 고기를 바삭하고 맛있게 구워야 한다), 출장을 갈 일이 있으면 가장 좋은 차를 대령해 상사가 불편함이 없도록 운전기사 노릇을 하고(이 때도 차 안에 어느 좌석이 가장 상석인지 미리 계산해 지체 없이! 안내한다), 점심 및 저녁 식사를 할 때는 상사가 먹고 싶은 메뉴를 미리 관심법으로 알아내 예약을 하고, 어쩌다 약속이 있어 나갈 때는 상사가 혼자 밥을 먹는 일이 없도록 다른 직원을 미리 섭외해놔야 하고, 혹여나 미리 밥을 먹었더라도 상사가 원한다면 기꺼이 다시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


정상 의전과 생활 의전의 공통점은 "나를 없앰"에 있다. 오롯이 내가 모셔야 하는 분의 편안함이 주목적이 되는 것이다. 의전 일을 하며 주로 듣는 이야기는 "튀지 마!"였다. 그중에서도 생활 의전의 가장 큰 쟁점은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오롯이 조직의 일원, 상사의 부하로서의 정체성만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의전관은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 춘향이, 이도령, 향단이가 아니라, 이 연극을 준비하는 조연출이나 작가쯤이라고 했다. 하지만 의전이라는 연극은 정상회의가 끝났다고 다가 아니라,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직장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권위적인 이 체계 속에서 우리는 계속 향단이 보다 작은 존재로 나를 한 없이 낮추고 살아간다.




주인이 아닌데 주인의식?


침몰하는 배에서는 어떡한다?


한창 회사가 어려울 시기가 있었는데, 상사는 수시로 우리를 모아 놓고 침몰하는 배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니 주인의식을 가지고 노 타수를 저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은 이 배의 손님일 뿐이고(자긴 위에서 내려온 파견직이고 나는 계약직이었다), 우리가 주인이니 침몰하는 배를 구하기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란다. 응? 나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단이 보다 못한 내가 어떻게 이 배의 주인인가? 이제까지 주인 대접을 받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주인의식이 생기지? 배가 침몰하려 한다면 배를 탈출할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주인의식을 갖고 일을 한다는 거지? 주인도 계약직이 있나요?


나는 곧장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고도 싶었지만, 심지어 주인이길 거부하는 상사가 나를 해고하려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난 바로 후부터다. 맘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곧 이직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여기저기 지원서를 넣기 시작했고 곧 면접 일정도 잡혔다. 그때까지 나를 자를 거라는 사실을 사무실 온 직원들이 다 알면서 나한테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상사는, 아니나 다를까 내가 이직 준비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불처럼 화를 냈다. 어떻게 말도 없이 이직 준비를 하냐는 거였다.





드레스를 입은 노예


옷을 만들어 입는건 꽤 재밌는 일이다 @아비장 드쁠라또

코트디부아르에 온 이후 국제기구 직원으로서 나는 종종 의전을 하지만, 또한 많은 경우 주인공 역할을 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랜 기간 노예근성을 학습해와서, 주인공 역할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가 된다. 하루는 디렉터의 해외 출장으로 나는 유엔 환경을 대표해 한 리셉션에 참가했다. 디렉터는 손수 빤유(아프리카 옷감)를 골라 맞춤 드레스를 만들어줬다. 디렉터의 초청장을 들고 가자, 행사장에서는 나를 VIP룸으로 안내했는데, 거기엔 대사님과 장관급 고위 관료들이 앉아있었다. 이날 만을 위해 만든 고운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나는 이런 상황에서 행동법 배운 적이 없었고, 항상 주입되었던 대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살며시 앉았다.


"쟨 누구지?" 잠시 나를 쳐다보던 대사와 장관들은 나에게서 곧 관심을 거두고 자기들끼리의 대화로 돌아갔다. 그들이 관심이 불편했던 나는 "튀지 않게" 잘 자리에 앉고서야 다소의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눈만 땡그랗게 뜨고 다른 향단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나 쫑긋 듣고 있었다. 마치 내 자리가 아닌 곳에 앉은 것처럼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곧 젊은 흑인 남자 한 명이 VIP방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대사와 장관들에게 악수를 먼저 청하며 자기의 이름과 소속을 밝혔다. 아!! 그제야 종으로 머리를 한 대 처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늘 그래 왔던 대로 잘 숨는 것이 아니라, 이번엔 나를 밝히고 반짝 빛나야 했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행동규범에 대해서 재정립이 필요했다. 이렇게 계속 노예의 태도로 살다가는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과 드레스를 걸쳐도 아무도 나를 대우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중요성은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하는데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때 이후로 중요한 행사에 초대를 받을 때마다 어떻게 행동하고 대화해야 하는지 조금씩 연습해야 했다. 먼저 옆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웃으며 차를 권하고, 대화거리를 찾아내는 것도 그 연습 중 일부였다. 물론 습관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나는 아직도 주인공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알고보면 나도 어려서 부터 쇠사슬에 묶여있던 큰 코끼리가 아닐까? 내 힘과 능력으로 이 연약한 쇠사슬쯤은 아주 쉽게 끊을 수 있는데 다만 해본 적 없어서 반항하지 못하는 상태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작게 만들지 않고, 큰 사람이라 생각하며,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해보려 한다. 나를 작아 보이게 만들고 업신여기는 사람을 멀리하고 귀 담아 듣지 않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그들이 우리를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소중하게 여기자. 용감한 큰 코끼리가 될 우리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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