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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양파씨 Apr 02. 2019

내가 왜 여기 아프리카까지 왔는지

관료주의, 체면 차리기란 거짓 신을 모시는 거짓 종교, 한국사회를 떠난다



내 속에 화뿐이었다.
그리고 내 몸은 힘들다고 소리 질렀다.



지난 2년간을 뒤돌아보며 내 속을 들여다보니 온통 화뿐이었다. 온통 까맣고 빨갛고  얼룩덜룩 찢어져있었다. 억울하고 울분이 났다.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못나 보이고 바보 같아 보였다. 직장이라는 곳이, 한국사회라는 이 곳이 나의 자존감과 존엄성을 있는 대로 무너뜨리고 짓밟았다. 자존감과 존엄성이 무너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많은 시간 건강을 상해 가며 야근을 했고 주말에 일했으며 추석에도 사무실에 나와야 했다. 내가 일하는 이 직장이 조금이라도 나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원래 내 업무도 아니었던 일들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온몸에 붉은 두드러기가 나고 손이 슈렉처럼 부풀어 올랐던 날도 있었다. 손이 그렇게 부풀어 오른 건 처음 본터라, 이상한 전염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남자 친구가 병원까지 데려다주는데 혹시라도 전염병이 옮을까 봐 손도 잡지 않았다. 내가 서른 번째 생일을 맞던 날이었다.


"알레르기네요~"

"네? 전 한 번도 알레르기가 있었던 적이 없는데요?"

"갑자기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특정 음식을 먹으면 이런 반응이 일어날 수 있어요. 최근에 먹은 음식 어떤 게 있는지 다 한번 말해보세요. 그 원인을 꼭 알아야 해요."

"글쎄요 그냥... 연어덮밥이랑, 피자랑..."

"그런 건 알레르기가 일어날 리가 없는데... 다른 건 또 없어요?"

"진한 생강차를 두 잔 마셨는데..."

"그거일 가능성이 가장 높네요. 생강."


평생 그 많은 김치를 먹었는데 괜찮았다. 그런데 생강차로 알레르기라니... 몸이 시뻘겋게 난리가 나고 미친 듯이 가려워서 겨울이지만 도저히 니트류를 입을 수 없었다. 알레르기를 악화시킬 수 있는 단백질 음식도 최대한 피해야 했다. 단백질 안 들어있는 음식이 뭐가 있냐고!! 이렇게 아예 만성 아토피가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내 전임자도 건강이 나빠져 퇴사했다고 들었다.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만났던 그녀는 팔이며 다리며 여기저기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그나마 밴드를 못 붙인 곳에 붉은 상처 같은 자국들이 선명했다. 그녀도 처음 스트레스토 시작되었던 알레르기가 반복되어 만성 아토피가 되었다고 했다.


치질 수술을 두 번 받았다. 첫 번째 수술은 전 직장에서 "그 일"이 끝난 직후였다. 대통령이 우리 기관을 방문을 하는데 외국인들 옆에 앉아 대통령이 하는 말을 불어로 통역해야 했다. 영어도 아니고 겨우 먹고 살 정도로만 하는 불어로 통역을 그것도 대통령과의 오찬 자리에서 하라니. 스트레스가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일이 끝나고 일주일 만에 너무 통증이 심해져서 수술을 받았다. 두 번째 수술이 바로 이번 직장에서였는데, 매년 새해 초 새로운 상사가 오면 그에게 새롭게 맞추는 것이...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일으켰다.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있는데 눈물이 쏙 나게 아프지만 회사에 있지 않은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쓰러질 것 같은데 쓰러지지 않았다. 햇빛이 뜨겁고 더운 2018년의 여름날이 이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너무 어지럽고 몽롱했다. 당장 필름이 끊어져 쓰러질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 맛난 아란치니를 먹어도 커피를 연달아 마셔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상태가 며칠을 가다가 도대체 이게 무슨 병인가 싶어 검색을 해보았더니, 일단 그럴듯한 병명은 빈혈, 갑상선, 간의 피로 같은 게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도 갑상선 수술을 받았으니 혹시라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내과를 찾아 피검사를 받았다. 빈혈일 수도 있으니 철분제도 사(비싸다!!) 먹었다. 


"빈혈도 아니고 갑상선도 아닙니다"

"잉??? 그럼 뭘까요???"


며칠 만에 나온 피검사는 나더러 아무것도 아니란다. 빈혈이라도 걸렸으면 약한척하며 회사라도 좀 빼먹으려 했더니 그것도 아니라니. 아무것도 아니라니 더 슬퍼졌다. 왜 이렇게 어지럽고 몽롱했는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했다. 그냥 스트레스려니 하며 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병명은 알 수 없지만 아는 게 하나는 있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넌 왜 원뿔이니? 우리는 다 네모인데.


참기 힘든 것은 다른 철학을 가진 직장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것이다. 오랫동안 네모로만 살아온 사람에게 원뿔인 나는 정말 이상한 도형이었다. 그가 매일 반복적으로 하는 말은: "너는 왜 원뿔이니?? 너무 뾰족하지 않니??"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나는 어느새 싹수없고 개념 없는 요즘 젊은것이다. 나는 /아침에 자기보다 늦게 출근하며/ 저녁에 가장 일찍 퇴근하고/ 예의 개념이 없어 식사자리에서 상석에 먼저 앉고/ 주말 출근을 하지 않으며/ 점심을 먹고 왔다는 이유로 상사와의 점심을 거부하고/ 주말에 문 닫은 인쇄업자를 재촉하여 보고서를 찍어내지 않는 이유로 무능력하고/ 직장생활이라고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외국에서 살다온 개인주의자/였다. 


그래. 그럼 내가 이제까지 했던 것을 모두 반대로 하면 나는 유능한 네모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유능한 직장인이 되기 위해 /주말에 쉬는 인쇄업자를 문 열도록 압박하여 보고서를 찍어내고/ 그가 출근하는 시간보다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점심을 먹었더라도 그가 원한다면 군말 없이 다시 밥을 먹으로 나가고/ 일이 없어도 주말에 나와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그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순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나빠도 티를 내지 않고 술집 언니처럼 빵긋빵긋 웃어주며/ 식사자리에서 재빨리 상석을 계산하여 직급별로 앉도록 안내하고/ 개인의 일과 사랑 든 둘째치고 직장과 상사의 안위를 위해 일하면 되는 거였다. 후후 훗!


세상에 이렇게 욕먹을 일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참 이상했다. 그 오랜 시간 초중고 대학교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나의 독립적인 자아를 성장시키고 또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 어느 누구도 사회가 이런 곳이라고 알려줬던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말이다. 훌륭한 네모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에서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누구 하나 알려줬던 사람이 없었다. 책에서 배운 도덕과 윤리와 상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이 사회는 그런 가치가 중요시되는 곳이 아니었다. 이제껏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사이비 신을 절대신인 모냥 모시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이상한 원뿔 신을 모시고 있는 거던지.


밤이 되면 자려고 침대에 누워 또 화만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저 긍정적이고 밝게 사는 게 인생의 목표였는데. 뜬 눈으로 뒤척이다가 잠이 오지 않아서 차마  따박따박 내뱉지 못한 말대답을 원뿔 모양 뾰족뾰족 일기장에 적어내려 갔다. 내가 할 말이 없어서 또는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입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죽을 죄인처럼 앉아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었던 말들을. 그렇게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내 속이 고장 나서 썩어버릴 것 같아서 일기에 화풀이를 해댔다. 그렇게 적고도 당신이 내 머리에 던지고 간 끔찍한 말들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화가 나서 내 마음속이 온통 빨간색이었고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내가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먹고 싶지 않으면 안 먹는 거였다. 내가 웃고 싶으면 웃고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않는 거였다. 그냥 그런 거였다. 


"너 이 직장에 아직 미련이 남은 거야?"

퇴사를 결정하고도 마음이 흔들리던 와중에 친구가 던진 이 질문은 9회 말 끝내기 홈런이었다.


계약직 노예에서 정규직 노예로 신분 상승하여 내 삶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 이 사이비 종교에 헌신하며 중요하지도 않은 의전, 관료주의, 체면 차리기라는 신을 모시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에 얼마나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있는가? 그저 작게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런 사이비 종교에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훌륭한 네모 따위는 처음부터 되고 싶지 않았다. 떠나는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고 미련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다짐만은 진심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일해 살아남아 사다리꼴이 되어있었을 내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아프리카로 떠나기 석 달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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