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문장

by 오슬

황해도 산간, 해묵은 눈더미처럼 고요한 마을에 허정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으로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정 말석에 한 자리하던 조상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웃에게 쌀을 꾸어 끼니를 잇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허정은 입신양명하여 가문의 명예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했다. 날마다 붓을 들고 서책을 베개 삼듯 가까이했지만 둔한 머리와 무뎌진 붓끝으로는 문장 한 줄 만족스럽게 써내기 어려웠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픈 욕망은 더욱 깊어졌다.


어느 날 산길을 걷다 소나기를 만나 급히 들어선 허름한 서원, 그 벽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람은 언젠가 부끄러움 앞에 선다."

투박한 붓놀림이었지만, 문장은 얼음처럼 맑고 단단했다. 순간, 서늘한 것이 허정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평생 찾아 헤맨 문장이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문장이 따라갈 수 없음을 깨달은 허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글을 포기했다. 대신, 그 문장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

문장의 주인은 이호라는 젊은 서생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과거를 볼 자격조차 없어 붓 대신 쟁기로 밭을 일구는 이였다. 허정은 우연을 가장해 그에게 접근했다. 밥을 사고 술을 사며 친구가 되었고, 밤이면 이호의 방에서 공평치 못한 세상을 논했다. 그리고 그가 잠든 틈을 타, 그의 문장을 훔쳤다. 이호의 글은 아팠고, 맑았고, 뜨거웠다. 허정은 그것을 필사하며 속에서 올라오려는 죄의식을 눌러 삼켰다.


그해 가을, 허정은 과거에 응시했다. 제출한 글은 이호의 문장을 교묘하게 비틀어 완성한 것이었다. 결과는 장원. 사람들은 그를 천재 문장가라 칭송했다. 허정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은 비어 있었다.

‘내 글이 아니야. 하지만... 시작은 아니지만 내가 완성했어. 내 글이야.’

그는 침묵함으로 자신과 세상을 속였다. 주위의 찬사와 기대가 그를 휘감을수록 그것에 익숙해져 갔고, 시궁창에 담근 발을 빼기보단 더 휘저어 무언가를 건지려 했다.

문예에 관심이 많던 세자가 그의 문장을 눈여겨보았다. 허정은 세자의 문학 스승이 되었다. 자신의 부족한 지식에 처음엔 고서의 글들을 읊으며 시간을 버텼지만, 세자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허정은 매번 붓을 들 때마다, 예전에 필사했던 이호의 문장들을 다시 꺼내 썼다. 그것은 창작이 아닌 되풀이되는 절도였고, 범죄였다. 더구나 조선의 왕이 될 이를 상대로.


그 무렵, 이호가 한양에 올라왔다. 아무 말도 없이 허정 앞에 나타나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말보다 무서운 침묵. 허정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쥐었다. 그날 밤 이후, 허정은 오랫동안 붓을 들지 못했다.

얼마 뒤 세자는 문장 대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글이 올라왔다.

세자는 먼저 도착한 글들을 훑어보다가 한 편의 글 앞에 멈췄다. 이름 없는 한 백성이 적은 문장이었다. 글은 깊고도 단정했다. 그리고 낯설지 않았다.

세자는 허정을 불렀다.

“이 글을 읽어보시겠습니까. 묘하게 선생님의 문장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다릅니다.”

허정은 글을 펼친 순간 손끝이 떨렸다. 그것은, 과거 급제 당시 제출했던 문장의 원형이었다. 그보다 더 살아 있고, 깊었다.

“이 글, 선생님의 것입니까?”

그 물음에 허정은 한마디도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부정이 아닌 자백이었다.

진상은 곧 밝혀졌다. 허정은 문서 위조와 왕실 기만의 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의금부 앞 뜰, 모든 눈이 허정을 향한 자리에 이호가 증인으로 나타났다. 꿇어앉은 허정을 조용히 바라보던 이호는 한마디를 남겼다.

"지난날 내게 산 술 한 잔, 그것으로 값을 치렀다 생각하겠습니다."


그날 밤, 감옥의 허정을 이호는 조용히 찾았다. 말없이 술잔을 건넸고, 허정은 묵묵히 받았다. 오래전처럼, 말없이 술만 마셨다. 그러나 허정은 알았다. 이호의 침묵은 용서가 아니었다.

유배를 떠나는 수레 안, 허정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았다. 문득, 그날 새벽 서원 벽에 붙어 있던 한 문장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 문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떨림, 그리고 지금의 참담한 후회가 겹쳐졌다. 부끄러운 자신을, 이제야 제대로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제야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만의 문장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 이호의 글을 훔친 것이 단지 한 줄의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영혼을 훔친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이 늦었다는 것도...


몇 해가 흐른 뒤, 지방을 돌아보던 세자가 한 서원에 들렀다. 아이들이 재잘대며 글을 읽는 곳, 그 끝에 이호가 앉아 있었다. 벽에는 바랜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람은 언젠가 부끄러움 앞에 선다.”

세자는 한참을 문장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종이 한 장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글은 베낄 수 있어도, 스스로는 속일 수 없다.”

비가 내리자 먹물이 번져갔고, 두 문장은 조용히 서로를 품었다. 진실은 오래 감춰질 수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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