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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온도 Oct 02. 2022

맏이라서, 장녀라서

 


‘K-POP’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어서 일까?  K뒤에 붙는 신조어들이 나날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중 몇 달 전부터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K-장녀’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사회는 태어나자마자 나의 지위와 역할이 정해진다.

최근엔 부모들의 육아 멘토의 오은영 박사님의 금쪽 상담으로 이 지위와 역할이 덜 강요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도 어쩔 수 없는 잔재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를 떠올리며 언니 생각을 참 많이 했다.

‘K-차녀’인 나는 서른이 좀 넘어서야 ‘K-장녀’의 고충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기에.


1989년 5월, 날씨조차 새 생명을 반겼을 봄날. 어른들만 있던 시골 대가족에게 첫 아이가 태어났다. 진 씨 가문의 장녀. 바로 우리 언니다.


언니는 우리 가족의 첫 아이였고, 첫 손주였고, 첫 조카였다. ‘첫사랑’의 설렘과 아련함이 평생 가는 것처럼 언니는 온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 물론, 내가 태어나며 그 꽉 채워진 사랑을 2년이 채 가 나눠야 했겠지만. 가족들 사랑을 배제해도, 언니는 어딜 가든 똘똘하고 호기심 많은 귀염둥이였다.


“말도 마. 시장에 가서 내려놓으면 두부 ‘톡’ 떼어서 먹고 놔두고, 남의 집 놀러 가면 이불장에서 이불 다 꺼내서 헤집어놓고. ”


엄마는 고갤 저으면서도 한편으론 웃으며 이런 얘길 하셨었다.

가끔 사고를 쳐서 엄마를 힘들게 했지만 ‘밉지 않은 귀염둥이’인 언니는, 내가 태어나고 사랑을 나누는 법을 배웠고,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장녀가 되어갔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 난 학교 근처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집에 놀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고, 학교가 끝나고 별생각 없이 곧장 친구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친구 집에서 간식도 먹고 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학원에 갈 시간이라 함께 나왔는데, 걷다 보니 갑자기 친구가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고, 낯선 동네에서 난 길을 잃게 되었다.


‘어? 아까 왔던 곳인데...’


한참을 빙그르르 돌고 다시 원점. 결국 친구네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집전화를 빌렸다.


“여기 친구네 집인데, 집 가는 길을 까먹었어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그래도 친구네 집전화를 빌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는 번호라곤 그나마 취학 전 간신히 외운 집전화번호 달랑 하나. 그마저도 언니가 바보라고 놀렸던 덕분에 똑바로 외워두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친구 아빠의 설명으로 나의 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옆동네에 있는 나를 데리러 와주셨다.

그때 길을 잃었던 기억이 무서웠는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분명히 남아있는데, 재밌는 건 언니에게도 이 일은 기억에 남는 일이었단다.


“내가 그때 온 학교를 누비며 널 찾느라 얼마나 울고 다녔는데.”


 처음 언니에게 이 이야길 들었을 때 깜짝 놀랐었다. 집에 서면 모를까,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놀기 바빠 나를 생각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그날 갑자기 친구네 집에 가게 되어 언니에게는 말할 생각조차 못했었고, 언니는 학교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하는데 갑자기 동생이 없어져 온 학교를 누비고 다닌 것이다. 나를 찾겠다고.

언니는 당시 생각에 어이없는 화가 났겠지만, 난 왠지 모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용했던 나와는 달리, 골목대장 스타일이었던 언니는 그렇게 언니 방식대로 사랑을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자기한 인형놀이를 좋아했던 나와 스피드 한 자전거를 즐기던 언니의 표현방식이 달랐을 뿐. 그 사랑의 크기는 같았던 건데, 너무 늦게 알아줘 버렸다.


‘맏이니까 본보기가 되어야지, 그래야 동생들이 널 따라 잘 할거 아니니.’


 맏이라면 한 번쯤은, 아니 적어도 몇 번은 들어보았을 말. ‘언니니까’,’ 누나니까’. 언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정한 ‘K-장녀’로 거듭나고 있었다.

어릴 때는 언니에게는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게 그저 부럽기만 했다. 모든 걸 물려받아 써야 했던 나와는 달리, 언니는 모든 게 새것이었으니까. 가족의 첫사랑인 것도,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유연하게 잘 표현하던 것도, 나와는 다르게 공부도 잘하고 자신감 있는 언니가 정말 부러웠다. 그런 언니를 따라 하고 싶어 없는 용기를 짜내어 반장선거에도 나갔던 나다.


그런데 그런 언니가 처음으로 이해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서울살이를 하던 때였다.

내 마음속 우상이었던 언니가 사춘기 소녀의 탈을 쓰고 방황하는 모습은 내가 알던 ‘멋짐’이 아니었다. 엄마와의 불편함이 시작된 때도 그때였다.


한 번은 작은 소반에 저녁을 차렸는데, 버럭 화를 내더니 안 먹겠다며 밥상을 그대로 엎어버렸다. 제육볶음을 담아 두었던 접시가 그대로 엄마 침대 옆에 나 뒹굴었고, 순식간에 안방은 엉망이 되었다. 예민한 언니를 내가 괜히 건드려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릇들을 치우며 서러움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밤 12시를 넘겨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고, 내 저금통의 지폐들이 눈에 띄게 사라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는 이사를 결정했고, 언니의 가면은 서울에 놓고 오길 바랬다.

이사를 온 이후에도 1년 간 방황은 계속되었지만, 예측하지 못한 돌풍이 일었고, 언니는 중학교 2학년 말이 되어서 제자리로 돌아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빠의 부재는 나비효과처럼 우리 가족의 공간, 생활 그리고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다.

그때는 마냥 사춘기의 일탈이라 생각했지만, 언니도 분명 마음 기댈 곳이 없어 그랬을 것이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지낸 탓에 엄마의 신뢰를 잃었고, 언닌 아주 불안정해 보였다.

그래서 그러던 걸까. 맏이, 장녀의 역할을 해왔던 자신을 전부 다 내려놓을 만큼 언니는, 가족이 아닌 자신 그리고 친구에게 비빌 언덕을 찾아 나섰던 것 같다.



언니가 중학교 2학년, 시끄러운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가 되어있었던 그때. 난 1학년이었고, 교내 축제 노래대회에서 친구와 함께 대상을 탔었다. 언니는 생글생글 웃는 모습으로 복도에서 기다리는 나를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었다.


“응 맞아. 오늘 노래대회 대상 탄, 내 동생이야.”


그날 언니 얼굴은 초등학교 2학년, 동생을 끔찍이 아끼던 그때의 모습이었다.

그 복도에서 난 언니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그 후로 내려놓았던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요령 없이 전투적으로.

쉽게 지치지 않을까 했는데, 칭찬의 힘은 언니를 춤추게 만들었고, 고등학교 내내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보다 환자의 입장을 잘 생각하는, 11년 차 간호사가 되어있다.


한참이 지나고 언니의 방황이 추억거리가 되었을 무렵, 내가 잔소리를 많이 하고, 버릇없이 언니를 가르치려들어 화나고 짜증 나던 마음만 잊었는지, 언니는 내게 눈물을 보이며 미안하다고, 미안했었다고 말했다. 나에게 상처를 주어서,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지금 언니는 어느덧 예쁜 두 남매의 엄마로 빈틈없는 서른넷을 보내고 있다.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언니는 바쁜와중에도 나의 건강을 살핀다.


‘당화혈색소 좋아졌던데. 다행이다. 잘하고 있어’

‘아프면 언니한테 바로바로 말해.’


20살, 내가 막 당뇨 진단을 받았을 무렵, 언니는 간호사 국가고시를 합격했었고, 내가 다니는 병원에 합격해 여전히 근무 중이다. 그 덕분에 난 심적으로 편안히 병원에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언니가 의료계에 종사하지 않았다면, 갑자기 닥친 모르는 병에 더 불안하고 힘든 마음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모르는 병에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면 언니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코로나 초기에도 그랬고, 내가 자궁 증식증으로 수술을 할 때도 그랬었다. 희한하게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위안이 되고, 일렁이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근데, 아직도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다. ‘K-장녀’라는 단단한 껍질 안에 얼마나 여린 마음이 있는지,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고,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는지.


언니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언니, 장녀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지금도 너무 잘하고 있어. 그러니 가끔은 온전한 언니여도 돼. 언니는 있는 그대로 빛나고, 참 소중한 사람이야. 그리고, 언니가 나의 언니어서 정말 고마워. 정말… 정말 자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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