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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온도 Sep 30. 2022

진실의 공간



15평 남짓한 반지하의 공간.

엄마와 우리 삼 남매가 사는 집이다.

열두 살이었던 언니와 열 살의 나, 그리고 여섯 살 남동생, 그리고 아직 젊고 예쁜 나이에 삼 남매의 홀어머니가 된 엄마. 빌라 입구에서 서너 계단을 내려가면 왼쪽 집. 하얗고 무거운 현관문을 열면 거실이라고 말하기는 작은 복도 같은 공간이 있고, 왼편으로는 작고 좁은 부엌이, 그리고 현관에서 두 발짝거리에 마주한 방은 엄마와 남동생이 쓰는 안방이 있다. 현관에서 작은 복도를 다섯 발자국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두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화장실과 그 오른쪽엔 언니와 내가 쓰는 자매의 방이 있었다.


우리가 온종일 뛰어놀았던 놀이 생활권은 손바닥보다도 작아졌고, 어딜 가나 따뜻하게 품어주던 어른들의 시선들이 낯선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우리를 돌봐주시던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시골 우리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단층 주택.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의 왼쪽으로는 작은 꽃밭과 포도나무가 넝쿨져있는 커다란 수돗가가 있고, 마당 오른쪽에는 증조할머니가 계신 별채가 따로 있었다. 대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외양간과 화장실,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고, 뒤뜰에는 살림살이에 쓰는 장독대가 소담스럽게 자리해있다.

아담하고 정겨운 시골집.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볼일을 보는 화장실이 재래식이었다는 점이었는데, 특히나 추운 겨울밤에 볼일을 보러 가는 건 여간 무섭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늘 정겨운 소리로 가득했던 집이 이토록 적막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그저 집안에서 화장실을 편히 드나들 수 있고, 학교에 가야 사 먹을 수 있었던 군것질거리를 이제 맘만 먹으면 도보 2분 거리의 슈퍼를 이용해 편하게 다녀올 수 있어 마냥 신기하고 좋았지만, 그 또한 잠시였다.


길동사거리에서 작은 선술집을 운영하게 된 엄마가 새벽 2시를 넘겨 집에 오니, 난 학교에 다녀와야 겨우 눈뜬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창 철들지 않았을 나이의 엄마.

물론 어린 나에게 엄마는 누구보다 멋지고 큰 사람이었지만, 서른셋의 엄마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홀로 아이 셋을 키우며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엄마의 맑은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언니는 친구가 먼저였다. 엄마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언니 마음의 공허함이 커질수록, 친구를 의지하는 일은 잦아졌고, 어린 동생들을 살뜰히 챙기던 맏이의 모습도 점점 잦아들어갔다.

자연스레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던 일곱 살 남동생을 돌보는 일은 대부분 나의 몫이었다.

 

처음 밥을 지어봤던 4학년이 지나고, 이제는 볶음밥쯤은 간단해진 5학년이 되자 남동생과 밥을 차려먹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고, 엄마가 해놓는 음식들을 데워 먹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학교는 친한 친구 두 명이면 그만이었던 곳이다. 그냥 조용히 전처럼 다니면 되는 학교.


서울에 오니 공부를 잘해서 칭찬받고, 공부를 못해서 기가 죽어있는 아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왜 친구들은 쪽지시험을 못 봤다고 회초리를 맞으며 가기 싫은 학원을 그렇게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규칙이겠거니 생각했다. 하루하루 오늘도 무사히를 마음속으로 새기며 다니던 그때, 아무도 나에게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어느 순간 쳇바퀴 돌 듯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서울생활이 주는 편리함 그리고 영혼 없는 친절에, 겨우 5학년이 된 나는 벌써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었다.



아빠가 하늘의 별이 된 지 2년 정도 흘렀을 때. 나의 몸과 마음은 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이제 평생 볼 수 없다는 것, 평생 온전한 가정이 아닌 반쪽짜리 의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알게 될 때쯤이었다.


‘아무도 없다.‘


엄마는 가게에, 남동생은 학원에, 언니는 아직 오지 않은 집. 일찍 하교한 나는 집에 혼자 있다.

아무도 없는 틈이 유일하게 나의 마음을 달래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 화장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웅크려 앉아있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은 용기 있는 소리로 하늘을 보며 외쳤다.



“아빠 혼자 가버리면 우리 가족은 어떡하라고, 왜 혼자 간 거야, 언니도 엄마도 다 힘들고 나도 이렇게 힘든데...  그래도…거기서 잘 지켜줘. 우리 더 힘들지 않게.”



‘나도 그냥 아빠를 따라가면 마음이 편해질까’

‘옥상에서 그냥 떨어지면 삶을 좀 놓을 수 있을까.’


혼자 끙끙 앓던 넋두리를 밖으로 꺼내 보았던 그때. 아빠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선택이었음을 어렴풋이 듣게 되었던 날 이후였다.

혼자서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토해내며, 소리 내어 울었다. 행여라도 누군가 내 울음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렇게 아무도 없는 집, 가장 구석의 화장실에서.


신기하게도 그렇게 울음을 쏟은 날은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아니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되던 그 행동들은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 나의 내면이 살기 위해, 그 악함을 토해내며 나를 지켜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언니보다 동생이 더 언니 같네.’


서울로 이사를 온 후, 가족들과 친척들은 나에게 이런 말들을 해왔다.

나에겐 칭찬도 꾸짖음도 아닌 말들, 언니는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의 어른스러움, 아니 어른스러운 척함은 불가피한 상황이 만들어 낸 어린날의 상처였기에.

어른들이 만들어 낸 상황과 어른들의 칭찬 아닌 칭찬에, 난 마음을 숨기는 일이 익숙했고, 나의 마음 숨김은 밤낮없이 일하며 우리를 먹여 살리는 엄마의 위태로운 외줄 타기에 그 끈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기질은 그나마 인내하는 것에 재능이 있었고, 그 마음으로 흔들리는 언니와 엄마를 조금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참 오만하고 귀여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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