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아이들 데리고 서울에 가려고요.”
엄마의 말소리가 방 사이 문틈으로 들려왔다.
모두 들떠 있었던 밀레니얼 시대, 2000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갑자기 서울?’
시골에서 나고 자란 촌뜨기가 서울에 간다.
엄마의 말은 갑작스러웠고, 한편으론 설레었고, 그러다 다시 또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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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1999년 어느 가을날
평소답지 않게 깜깜한 방안.
희미한 울음 소리에 눈이 떠졌다.
분명 학교 갈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누구 하나 깨우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한 기운에 일어나 방문으로 나가자 희미했던 곡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마당에서 큰소리로 목놓아 울부짖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그 옆에 표정없이 서있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엄마랑 아빠는 어디 갔지..?’
안방에서 나온 언니와 나는 부엌, 할아버지방, 집안의 방문을 모조리 열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마당에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 곁으로 가자 할머니는 우리를 안고 통곡하셨다.
“이제 너희를 어찌하면 좋나.. 어찌하면 좋아 불쌍한 것들...”
할머니의 목놓은 울음소리와 그 흐느낌이 아직도 내 몸속 어딘가에 흐르고 있다.
“삼촌, 우리 아빠가 죽었대.”
막내 삼촌의 전화에 언니가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죽었다.
그날의 기억은 이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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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았던 나. 하필이면 1월생이라 학교도 빨리 들어갔다. 예전엔 학교를 일찍 보낸 엄마가 미웠던 적도 있다. 왜 학교를 빨리 보냈을까, 아직 덜 자란 아이인데, 좀 늦게 보냈으면 어려운 것도 더 쉽게 잘 해냈을 텐데. 학교는 늦게 갔다면 조금 덜 부끄럼쟁이였을까,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내내 앞에서 두 번째 줄을 못 벗어나던 나에게 큰 산 같은 사람. 우리 아빠였다.
내 기억 속에 이제는 몇 컷 남지 않은 우리 아빠.
아빠의 모습은 나에게 큰 산이었다.
하교 길,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끝에서 두 팔을 벌려 나를 반겨주었고, 이내 번쩍 들어 안아주었던 아빠의 모습. 기억 속 장면을 인화할 수 있다면, 더 나이가 들어 잊히기 전에 뽑아두고 싶을 만큼 소중한 기억이다.
나에게 그런 큰 산이, 우리 가족을 지켜주던 버팀목이었던 아빠가 이제 세상에 없다.
집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며칠 동안 우리 집의 밤은 없었고, 각지에서 온 곡소리로 가득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자던 안방의 가장 안쪽 자리, 그곳에 아빠가 누워있다. 싸늘한 모습으로. 병풍에 가려져 있지만 아빠의 모습이 느껴진다. 소리 내어 우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울었다.
진짜 눈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슬퍼서도, 무서워서도 아닌 그냥 슬퍼하는 사람들을 따라 흘린 눈물이었다.
죽음을 알기에는 어린 나이 아홉살. 태어나 한 번도 누구를 떠나보낸 기억이 없기에, 소중한 사람의 부재가 주는 의미를 알리 없었다.
하얀 곡소리의 행렬, 추적추적 내리던 비, 차가운 공기 사이로 가을 입김이 나오던 장례의 마지막 날.
미라처럼 붕대에 꽁꽁 감긴 채 아빠는 땅 속 깊은 곳으로 천천히 잠들었다.
울음소리와 함께 묻힌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된 사실은. 아빠는 간질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서른이 넘고 그때의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가며 아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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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말 서울로 가는 거야?”
“응.”
지금의 내 나이, 서른둘에 혼자가 된 삼 남매의 엄마.
아빠를 보내고 꼭 일 년을 넘긴 2000년 11월 25일, 엄마는 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빌라, 작은 반지하 방으로 이사를 했다.
어떤 용기로, 여자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이 차가운 도시로 온 걸까.
하지만 그게 어떤 이유였던 서울에 온 이후 엄마는 더 강해졌고, 강해 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