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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온도 Sep 28. 2022

엄마에게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그 해 여름의 끝자락.

서울로 이사를 한지 채 2년도 되기 전에 우리 네 식구는 충북 청주로 이사를 왔다.


“청주로 간다고? 교육의 도시로 가네.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6학년 담임선생님 덕분에 청주가 교육의 도시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다. 나에겐 그저 조치원 할머니 댁에서 멀지 않은, 그리고 내가 태어난 병원이 있는 곳이었지만.


“서울에서 전학 왔대.”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들려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발, 나에게 주목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간단한 자기소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다른 반 아이들도 ‘서울에서 온 전학생’을 보러 복도 창문을 에워쌌다. 그래 봤자, 서울에서 고작 2년도 살지 않은 나는 서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서울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옷, 피부가 전보다 좀 하얘진 걸 뺀다면, 영락없이 시골소녀인데.


“여긴 수학여행을 언제가?”

“우린 벌써 3월에 다녀왔는데.”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서울에서는 가을에 예정이었던 수학여행을 청주는 봄에 다녀왔기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의 꽃인 수학여행을 이제 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 뺀다면, 아이들과는 짧은 3개월이었지만 금세 친해졌고, 어린이의 적응력으로 아주 조금 남아있던 서울 사람 티를 벗고 있었다.

그리고 딱, 한 학기를 다닌 학교를 졸업하고 난 언니가 다니고 있는 여자 중학교로 입학했다.


이사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엄마가 일을 배운 집의 체인점을 청주에 오픈하게 된 것, 그리고 언니를 서울 친구들과 떼어놓으려는 계획이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떨어져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은 언니였기에 1년이 넘게 방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이후는 꽤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네 식구가 사는 집은 11평 남짓한 공간, 엄마는 가게에 모든 걸 걸었다. 절반 이상이 빚이었겠지만.

그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가게는 생각보다 잘 정착되어갔다.


청주에 오픈한 1호 체인점, 독일식 소시지를 전문으로 하는 맥주 가게, 호프집. 오후 5시에 가게를 열면 새벽 2시가 넘어야 문을 닫는다.

엄마의 하루 일과는 온통 가게에 집중되어 있었다. 밤낮이 바뀐 일상, 일 년 내내 연중무휴의 삶.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쉰 적이 없었다.


여자 혼자서 삼 남매를 키운다는 것. 지금의 나는 상상하기 조차 쉽지않은 그 고된 세월. 엄마는 제대로 쉬는 날 하루 없이 1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덕분에 우리는 11평에서 24평으로, 그리고 가게를 정리할 때쯤 3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모두, 삼 남매를 키우고 빚을 갚느라 엄마의 노후자금은 고스란히 포기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주었던 엄마의 노력이 마음을 다 채우기엔 부족했었나보다. 그 때의 난 친구의 가족을 내내 부러워하곤 했다.


‘나중에 크면 꼭 저런 가정을 꾸려야지.’


딸을 끔찍이도 아끼는 딸바보 아빠, 작은 액세서리 가게를 하시는 다정한 엄마, 누나와 친구 같은 듬직한 남동생. 우리나라 평균 가족 4명의 인원에 꼭 맞춘 듯 단란하고 평범한 가족.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지금 당장 그런 모습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더 부러웠고 닮고 싶었다.

나의 미래가 그렇길 간절히 바랐다.


봄이 되면 내천 변에 핀 벚꽃을 보러 함께 나들이를 나가고, 여름휴가기간이 오기 전에 머리를 맞대고 휴가지를 고르고, 휴일이면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하고, 기념일이면 경양식집에서 선물을 나누며 서로 축하의 말을 전하는.. 그런 보통의 가족.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더 간절했던 날들. 물론 또 돈이 없으면 그마저도 불안한 삶이었겠지만.


우리 가족의 삶은 모두 가게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디를 가더라도 5시 전에는 돌아와야 했고, 명절에도 오전 제사가 끝나면 다시 가게를 열었다.

가장 손님이 없는 비 오는 일요일에도, 엄마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런 엄마에게는 철칙과도 같은 말들이 있다.


‘가게에는 늘 사장이 있어야 한다.’

‘연중무휴는 손님과의 약속이다.’


쉬지 않은 엄마가 걱정되기도 했고,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 것 같아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다.

‘가게, 일, 손님’ 엄마의 신경이 늘 한쪽으로만 쏠려있어 엄마 눈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걸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 보니 엄마의 철칙들은 주인의 자존심이었고, 우리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가게 가야 하니까 5시까지는 와야 해.”


 여름방학, 가족끼리 놀러도 가고 싶고, 보고 싶은 드라마도 실컷 보고 놀고 싶은, 자유의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내 밤낮은 바뀌었다.

 언니는 학원에 가야 하고, 남동생은 아직 초등학생.


‘제일 만만한 게 나지.’


하필이면 둘째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여자애로 태어나 매일 가게로 출근을 하다니.

그렇지만 내 마음은 매일 왔다 갔다 했다. 엄마와 웃으며 음식도 만들고, 서빙도 하고, 설거지하기도 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가도, 가게에 와서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 툴툴거리며 일한 적도 있었다.

하필이면 여름에 생맥주를 제일 많이 찾을게 뭐람. 아르바이트생 언니 한 명으로는 일손이 부족해 여름방학은 고이 가게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날은 아르바이트 언니가 11시쯤 가면 그 이후에 손님이 몰려올 때도 있어서 그런 날엔 어김없이 전화가 계속 울렸다. 받고 싶지 않은 전화를 결국은 받고, 심부름으로 부족한 재료를 사가며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엄마는 내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밤 12시에 혼자 가게를 오라고 하는 거야, 나 진짜 주워온 거 아니야?”


다른 집 부모들은 밤늦게 학교 끝나면 데리러 오고, 학원도 데려다주고, 금이야 옥이야 아낀다는데, 매번 딸을 스페어타이어 마냥 여기는 것 같은 엄마가 너무 미울 때면 이런 말을 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오히려 화를 내고 마음대로 하라며 전화를 뚝 끊었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으휴.’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뛰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가게로 향했던 나였다.


유일하게 일하지 않았던 수험생,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제외하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 7년간을 그렇게 엄마와 함께 가게일을 했다.

일을 하며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한 적도 많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 도움을 주었다고 느낄 때가 많다.


화가 나도 부드러운 어조로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 내가 바쁠 때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태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쉽게 만들 수 있고, 빠르게 치우는 것, 매일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시간 약속을 꼭 지키는 것, 코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것….


엄마를 도우며 성장한 나에게 생긴 능력들 덕분에

대학교 4학년,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에도 매일 한 끼의 한식을 어렵지 않게 차려 먹을 수 있었고,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에도 크게 인사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고,

센터장 시절, 나의 감정이 흔들릴 때에도 팀원들에게 한결같은 태도를 지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신감이 없던 내가 더 밝아졌고,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엄마 덕분이다.

‘나’라는 인격체를 만들어 준 10대 시절의 고단한 추억.


“엄마 나 오늘 3시간 동안 계속 설거지만 했어.”

“오늘 진짜 고생했어, 그래도 손님이 많아서 뿌듯하지?”


힘들어도 손님이 많다면 좋은 엄마. 체력 좋은 엄마와 내가 둘이 서너 시간 만에 매출을 백만 원 넘길 때도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

.


“엄마 무릎 아프니까 쉬엄쉬엄 해요.”

“알겠어, 엄마 요즘 일할 때 말고는 무리 안 하잖아. 너는 아픈 데는 없어? 괜찮은 거지?”


서른이 넘은 딸에게 요 며칠 엄마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여전히 아픈 손가락인 둘째 딸. 내가 1형 당뇨를 진단받았을 때, 우리 엄만 어떤 기분이었을까.

내가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아마 죽어도 모를 거다.


엄마 옆에 항상 붙어있어서 일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사랑도 많이 받은 둘째 딸.

학원 한 번 못 보냈지만, 늘 웃는 모습에 밝고 건강했던 딸이 평생을 아플 거라는 말을 들은 엄마는

그날 이후 나에게 가게 일을 도와 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고집 세고, 목소리도 크고, 가끔 술에 취해 모진 소리를 하던 엄마는 이제 추억 속의 사람이 되어있다.

이제 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 이미 언니 덕분에 마흔일곱에 할머니가 되었지만, 요즘은 부쩍 엄마의 나이가 눈에 비친다. 가늘어지는 팔과 다리, 기운 없는 목소리, 얼굴의 주름들...

언제나 예쁜 우리 엄마지만, 세월의 길은 역시나 피할 수 없다.


 “예전엔 엄마가 참 철이 없었지….”


몇 해 전 엄마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너희를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서른두 살, 삼 남매의 가장이 된, 철들지 않은 엄마.

어쩌면 엄마가 철들지 않아서 우리를 지켜낸 것 일수 도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그저 잘 키워내야겠다 다짐한 엄마는, 살기 위해 삶에서의 투쟁 동지처럼 우리와 함께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다 커버린 지금에서야 자신을 돌볼 여유가 조금은 생겨, 그때를 추억하고 반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엄마, 엄마 인생도 다 처음이었을 거잖아요.

열네 살, 학교 대신 공장에서 미싱 일을 했던 것도

스무 살, 꽃보다 예뻤을 나이에 도망치듯 결혼을 해야 했던 것도

스물일곱,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던 것도

서른둘, 삼 남매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것도

서른넷, 사춘기 언니의 방황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잡아야 했던 것도

마흔,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도

나이 오십, 새로운 직장에서 밤낮없이 일을 하게 된 것도


돌아보면 참 짧은 순간들인데, 엄마에겐 길고 긴 지옥 같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이제 이런 걱정이 되는 걸 보면, 나도 어른이 되었나 봐요.


성치 않은 무릎으로 이제 본인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엄마가 마음이 쓰여요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주겠다고 큰소리쳤는데, 그러지 못한 딸이라 미안해요

이기지 못하는 당뇨와 싸우느라 나만 아는 이기적인 아이가 돼 버려서 죄송해요

늘 미안한 딸이 되어버려서 미안하고 또 미안한데...

그런 내 옆에서 우리 엄마로 있어줘서 정말 고맙고, 고마워요.


엄마,

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엄마를 존경하고, 아끼며, 사랑해요.

더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게, 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주세요.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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