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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Dec 04. 2021

불쾌한 세상의 유쾌한 가족 이야기

《시선으로부터,》 리뷰


시선으로부터, 

저자 정세랑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20.06.05

페이지 340


《보건교사 안은영》 원작자로 잘 알려진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정세랑 작가의 글을 접한 건 소설이 아니라 신문 기사 속 인용문에서였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헌사에 썼다는 “김상순 엄마, 정태화 아빠께.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일 거예요.”라는 문장이 충격적이어서 적어두었던 기억이 있다. 내 부모님의 딸로 태어난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라고 여기기 어려웠던 나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질투나는 발언이었다. 《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면서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야기의 중심인 심시선의 가족들이 하나같이 부모―혹은 부모의 부모―에게서 뻗어나온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제목이 '시선으로부터,'인 것도 소설이 중심 축인 심시선으로부터 강인한 정신을 물려받은 자들의 이야기임을 짐작하게 한다. 여담이지만 소설 중반을 읽을 때까지 제목의 '시선'은 그저 '시선을 주고받다'할 때의 시선인 줄로만 알았다. 시선으로부터의 해방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반 정도까지 읽었을 때에서야 심시선의 이름인 '시선'을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가 의도한 중의성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석의 재미를 주는 제목이라 생각한다. 제목이 쉼표로 끝나는 것 또한 심시선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담은 휴지休止의 의미로 느껴졌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이라는 인물의 십 주기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려는 가족의 이야기다. 제사라면 진저리가 나는 나로서는 이 가족의 추모 방식이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죽은 자를 기리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발견하는 각자의 서사가 매력적이었다. 회사에 앙심을 가진 자가 던진 염산에 맞아 트라우마가 생긴 화수와 괴물 CG를 만드는 우윤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물론 가장 인상적인 건 소설의 중심 축인 심시선이다. 낯선 나라에서 예술을 하는 아시안 여자, 타자성의 요소를 갖췄다고 할 수 있는 심시선이 예술 권력자에게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을 당하고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일어섰다. 그런 심시선의 굳은 심지는 자식들에게, 그 자식들에게도 이어진다.


책 뒤표지 김보라 영화감독의 추천사 중 '이 세계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고 심시선 집안 모임에 끼어 함께 팬케이크를 먹고 싶었다.'는 문장에 격하게 공감했다. 다들 다른 의미로 사랑스러운 인물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는 세계가 그저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 이 소설의 결정적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세상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수 대사처럼 '공기가 따가'운―'일곱 살짜리가 공원 화장실에서 강간당하고, 스물한 살짜리가 그저 이별을 원했단 이유로 목이 졸'리는― 세상이다. 세상에 크게 다쳐서 자식을 낳지 않기로 결심하는 화수같은 누군가가 있는가 하면, 흉흉한 뉴스를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누군가도 있다. 《시선으로부터,》의 인물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이유는 그 다름을 존중하고 각자 삶의 방식을 선택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서다.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20세기를 거쳐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도 그 사랑의 부스러기(?)가 느껴졌다. 비록 나는 '타인은 지옥'이고 '세상은 상처로 가득한' 곳이라 여기는 사람이지만, 이 불쾌한 세상을 내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에 힘을 실어 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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