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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근필 작가 Mar 26. 2023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

같이, 함께 멀리 갑시다

인간은 노동을 하며 삽니다.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고 소비를 하고 생활합니다.

노동의 종류와 범위는 단순 육체적 노동부터

고차원의 기술적, 예술적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노동의 강도가 높은 육체노동으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노동으로 얻는 수익은 너무나 적죠.

보통 하위권, 특히 최하위권 소득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해당되며,

생계형 노동자들로서 식사와 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일만 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지내는 기간은 짧을 수도 있고 거의 한평생일 수도 있습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먹고살기 위해,

생존과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을 잠시 쉬기도 어렵고,

아프거나 병이나도 참거나 간단한 치료 정도만 받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또한 일자리를 얻지 못해 무직으로

소득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삶의 형편과 삶의 질이 매우 좋지 않죠.



이러한 분들에게 국가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 기초 생활수급비 등

여러 경제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삶이 크게 개선되지 않고 역부족인 경우가 많으며

힘들고 고된 육체적 노동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현실에서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때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열악하거나

삶과 일상이 피폐, 황폐해져 생존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처지에 놓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다운 삶이 붕괴된 상태죠.



그래서 전 최상위 소득 계층에 해당되는 사람이나 기업에게서 일정 부분

이러한 분들에게 부의 재분배가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대목에서 아래와 같은 반론들도 가능합니다.

포퓰리즘이다,

소득을 내어주는 쪽은 열심히 일해도 일정 부분을 타인에게 내어줘야 하니

노동과 근로 의욕이 감소하고 그로 인해 국가의 혁신과 발전이 저해될 수 있다.

수혜를 받는 쪽은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국가에서 최소한 먹고 살 정도는 보장해 주니

나태함과 방만함이 증가하고 노동과 근로 의욕이 감소할 수 있다.



일리 있고 공감도 됩니다.

하지만 위의 가정이,

양쪽의 '일부'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양쪽의 '모든' 사람들이 해당될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위와 같이 우려되는 부작용은 깊은 고민과 연구를 거쳐

어느 정도 해결하거나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충분한 기간 동안에 공론화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능력주의가 반론에 근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위권, 최하위 소득 계층, 즉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나태해서, 노력하지 않아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점에 대해 일부 공감은 합니다만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금수저, 흙수저란 표현이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세습, 대물림되는 성격을 지닙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좋은 사교육과 엄청난 경제적 지원으로

좋은 학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갈 가능성이 높고

많은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열악한 가정 사정으로

변변한 사교육 한번 경험해 보지 못하기도 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남들 공부할 시간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며

공부를 계속하고 싶지만 경제적 부담으로 원치 않게 학업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출발선이 다르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의미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했을 때

그 사람이 가난하다고 해서

단순히 능력이 없어서, 게을러서,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이라고 단정 지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국가에서 최하위 소득 계층,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보다 강화해 준다면

출발선이 완전히 동일해지지는 않더라도

그 격차를 좀 더 좁힐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 그들에게는 큰 힘과 위안과 기회가 될 것이고요.



이러한 경제적 지원을 하기 위한 재원 마련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겠지만

전 앞서 언급한 최상위 소득 계층의 사람이나 기업을 통한

일정 부분의 부의 재분배가 좋을 것 같단 생각입니다.

만약 이 방법이 부적절하고 다른 좋은 대안이 있다면 그것 또한 고려해 보면 좋겠습니다.








한때 전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기본소득 정의를 보면,



"국가가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조건 없이,

즉 노동 없이 지급하는 소득을 말한다.

즉,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근로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생활을 충분히 보장하는 수준의 소득을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무조건성·보편성·개별성을 특징으로 한다.



핀란드 정부는 2년간 기본소득 도입 실험을 진행한 뒤

2020년 5월 내놓은 최종보고서에서

기본소득이 실업자들의 행복감 증가 등

복지에 끼치는 효과는 분명했으나

고용 촉진 효과는 크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이 밖에 스위스의 경우 2016년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시행하기도 했으나 부결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본소득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국가에서 하위권, 최하위권 소득 계층만이 아닌

모든 국민들에게 위와 같은 기본 소득을 제공한다면,

나에게 어떤 점이 좋을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유유자적 마치 신선 놀이하는 것처럼 지내지 않고,

하고 싶고 원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며 살 겁니다.

좀 더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할 수도 있습니다.

삶의 만족도나 행복도는 더 증가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소득은

첫출발인 재원 마련의 어려움이란 난관에 부딪혀 현실성이 낮아 보였고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고 판단되어

개인적으로 찬성이나 반대보다는 보류 상태로 남겨둔 상태입니다.



하지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본 소득이 아닌,

하위권, 특히 최하위권 소득 계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지금 보다 더 강화되길 바랍니다.

그분들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격차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됩니다.

부의 세습, 대물림도 이런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것 자체를 부정하거나 나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부의 격차와 부의 세습, 대물림으로 인해

그다음 세대들의 출발선이 너무나 크게 벌어진다면,

너무나 크게 벌어진 출발선으로 인해

부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면,

단순히 삶이 고달프고 힘든 것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분명 큰 문제입니다.

한 번쯤 이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사랑받고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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