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to Mar 03. 2018

어떤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때 과대를 맡게 되었다. 여러 교수님들을 챙기고 신입생이라 이것저것 행사가 많은 데다, 과제 많기로 유명한 과였다. 그렇다고 노는 걸 포기할 수도 없어서 부르는 술자리마다 꼬박꼬박 얼굴을 비췄던 걸로 기억한다. 좋은 대학에 가서 과외로 편히 용돈벌이 할 수 있었던 언니에게 질 수도 없어서 주유소로 시작해서 피자가게 주방과 패밀리 레스토랑, 서빙, 편의점, 카페 등 안 해본 알바가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바쁘고 몸이 다치는 기간은 다시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여름, 아빠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아빠는 언제나 공장이나 공사판에서 일을 했다. 그래서 아빠의 얼굴은 새카맣고 땀구멍이 마치 점처럼 짙게 보이고 피부가 두껍고 거칠다. 아빠의 눈썹은 짙고 눈은 작고 홑 꺼풀이다. 코는 잘생겼고 입술은 피곤하거나 몸이 안 좋으면 금세 염증이 생기고 갈라지고 부르튼다. 아빠의 이마에는 5센티정도 찢어진 흉터가 크게 나있는 데 몇 년 전, 아빠와는 친척인 아저씨가 큰 아빠 흉을 봐서 말다툼을 하다 그 아저씨가 벽으로 던진 술병이 깨져 이마에 박혀 생긴 흉터이다. 아빠의 키는 174인데 살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느끼는 아빠의 존재감 때문인지 그 누구보다 체격이 크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아빠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은 한마디밖에 남아있지 않다.

  

아빠는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라 밖에서는 친구도 많고 일도 잘했지만 집에서는 자주 화를 내고 얼굴을 찌푸렸으며 자주 큰 소리를 냈다. 나는 막내라 애교가 있어 가끔 장난을 치며 아빠와 놀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사이좋은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던 어느 날, 나는 아빠가 엄마를 때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무릎 사이 머리를 넣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맞은 것처럼 아파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모습이 너무 크게 그려져 아빠는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더 나이가 먹고 나도 여러 아픈 경험을 지나고 난 뒤 알게 되었다. 때로는 맞은 사람보다 때린 사람이 더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집은 아빠가 열심히 일했지만, 돈을 아끼는 법을 잘 몰라서 언제나 돈이 부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나 돈이 없다고 하는 부모님이 있었다. 나는 부모님께 돈 달라는 말을 잘 하지 못해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동네 치킨 집에 가서 전단지 돌리는 알바를 자주 했다. 부모님은 아실까. 사실 부모님들은 본인들의 생각보다 자기 자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릴 적 엄마는 어린 나를 외삼촌에게 자주 맡겼다. 엄마에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외삼촌이 나를 여러 번 성추행한 사실을 몇 번 얘기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언니에게 다시 그 사실을 듣고 엄마는 내게 왜 말하지 않았냐고 했다. 나는 말했다고 했다. 아빠는 그 사실을 엄마에게 전해 듣고 그 새끼 그럴줄 알았다며 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로도 어떤 별다른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종종 어떤 보호도 없이 외삼촌을 만나야 했으며 부모님은 내 앞에서 외삼촌을 나쁜놈 대하듯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정신병원을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외삼촌의 성추행이라는 사실보다 그에 따른 부모님의 대처가 더 상처가 되던, 가족이 전부인 어린아이였다.

 

아빠는 욱하는 성격이 있어서 자주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그 날은 언니와 내가 평소보다 더 심하게 싸운 날이었다. 몸싸움이 있었고 엄마는 안방에, 아빠는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나와 언니는 방에서 몸싸움을 했고 언니보다 키도 크고 뼈도 굵고 사춘기에 억울한 게 많았던 나는 언니를 더 많이 때렸다. 아빠는 언니와 나를 거실에 앉혀두고 말했다. “동생한테 이기지도 못해? 동생이 말을 안 들으면 칼로 찔러 죽여!”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아빠의 그 음성은 생생하게 귓바퀴를 돌고 돌았다. 아빠의 검지를 챙기지 못한 나는 여전히 중학교 2학년에 머무른 아이였다.

  

그 당시, 부모님의 삶은 고달프고 힘들었다. 사실, 자식들은 자기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저 막연히 아빠는 매일 육체노동을 하고 술을 마셨고, 엄마는 엄마의 친정 문제로 머리가 아팠다고 이해한다.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매일매일 서로를 의심하고 탓하고 괴롭히며 점점 지쳐 갔을 것이다. 그 사이 나에게는 외삼촌의 성추행과 친구들의 따돌림, 전단지 몇 만장, 사춘기 노는 언니들과의 어울림, 어릴 적 금지행위 등의 여러 일들이 지나갔다.

 

학교에서 과제를 하고 있는 데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와 아빠의 오른손 검지 두 마디가 강북에 있는 어느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병원으로 가면서 눈물이 나고 아빠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마음이 아팠다. 한 여름에 아빠는 검지 두 마디와 손을 다시 붙이려 뜨거운 적외선 불빛 앞에서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누워 있었지만, 결국 검지는 붙지 않았다. 아빠의 오른손 검지는 엄지와 다를 게 없이 짧고 끝이 뭉툭하고 빨갛다. 아빠는 운전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리모컨을 다룰 때에도 가끔 습관적으로 검지 끝을 엄지로 꾹꾹 누르곤 한다. 아빠는 아직도 자주 검지가 잘렸을 때 가족들이 잘 챙겨주지 않았다고 서운함을 담아 이야기한다.


아빠는 책임감과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큰아빠 대신 혼자 계시는 할머니를 모시러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래도 서울에 올라오면 언니나 나보다 큰아빠에게 먼저 연락하고 밥을 먹는다. 고모들에게도 항상 먼저 전화하고 안부를 묻는다. 아빠는 인생의 반 이상,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 두 마디를 잃었다. 모든 상황은 연결되어 있다. 누구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악의 상황은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나의 최악의 상황은 아빠의 검지이다. 스무 살 바쁜 여름이 다 지나고 나는 아빠의 검지와 어릴 적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아빠를 잊었다. 상처를 검지로 잊고, 검지를 상처로 잊고.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아빠에 대한 글을 쓰며, 잘 모르겠지만 그냥 아빠도 상처받고 상처 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기 전까지 성장한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어릴 때, 아빠도 어렸다. 모든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중요한 사실 하나에 집중해야 할 때가 있다. 아빠는 날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돌이키지 못할 과거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어린 나에게 상처 준 어린 아빠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가장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르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