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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o Mar 18. 2018

보고 다시 아프다  

오래전 다친 상처인데

최근 미투 운동으로 많은 유명인들의 성추행 사건들이 온라인에 여기저기 떠오르고 있다. 성추행 관련 기사나 지인의 경험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김없이 머리를 스치는 불쾌한 기억이 있다.


불쾌한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내가 아주 어릴 적 열 살이 안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무려 17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고요함과 움직임, 그리고 그 긴장은 아주 생생하게 내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


내 글을 읽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지 싶지만, 언젠가는 내가 꿈을 이뤄 작가가 될지도 모르니 (꿈은 생생하게 꾸라고 하였다.힣)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 진실은 어딘가에 있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허구 일지 감히 내가 판단할 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미투 운동이 대한민국에 꼭 한 번은 거쳐야 할 중요한 일을 할 것이라 믿고 있다. 대한민국에 실제로 성추행 경험이 없는 여자보다 있는 여자가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많은 장소와 시간에 감히 말로 꺼내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생각의 근거는 오로지 나의 경험에 있다. 나는 인생의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경험은 모두 사실이고 그것은 나 자신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무려 17년 전의 이야기이고 내가 어릴 적 이야기이니 기억이 꾸며지거나 손상되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반문한다. 너라면 그런 일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엄마와 외삼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내가 열 살 무렵, 외삼촌은 이십 대였다. 그때 내 나이를 정확히 알 순 없다. 왜냐면 그즈음, 그 일은 나에게 빈번히 일어났다. 열 살 무렵이라 생각한다. 혈기왕성한 이십 대의 나이에 열 살 조카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을 거라 엄마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어린 남동생이었을 테니까. 나는 어렸고 언니는 조금 커서 엄마는 외출을 할 때면 나를 외삼촌에게 맡기고 언니를 데리고 나갈 때가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언니는 엄마와 나가고 외할머니도 집에 없었다. 나는 외삼촌과 놀다 잠이 들었다. 분명 잠이 들었었는 데 무언가 이상한 손길에 잠이 깼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깨지 않은 척해야 했다. 외삼촌의 손이 내 성기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몸을 계속해서 만져댔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절대로 깨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래, 어린아이가 자는 척을 한들 정말 몰랐을까? 싶기도 하다.


어느 날은 티브이에 만화영화를 틀어주고 자기는 뻔히 옆에서 야한 동영상을 틀어놓았다. 내가 힐끔 거리며 쳐다보고 뭘 보냐고 물을 때마다 피식거리며 웃었다. 넌 보면 안 되는 거라며. 그 야한 동영상은 애니메이션이었고 그 장면이 아직도 떠오른다. 녹색괴물이 어떤 여자를 겁탈하고 있었다. 토할것 처럼 속이 매스껍고 더럽다. (어린 조카 옆에서 그런 영상을 보는 쓰레기의 취향까지는 도저히 이해해줄 수가 없다.)


단편적인 어릴 적 기억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생생하다. 어린 나는 그게 성추행인지 몰랐지만, 그게 잘 못된 거 같다고는 어렴풋이 생각해서 왠지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 중학생 즈음되었을 때 엄마에게 어렵게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뿐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어떠한 대처도 행동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점점 더 그 일을 잊을 수 없어졌다. 불쾌함을 주는 남자를 만나면 어김없이 그때 느낌이 들고 토할 것 같았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남자와 닿아 있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싫었다. 성폭행, 성추행 관련 이야기만 들으면 떠올랐고 점점 더 생생해지고 그 주변 기억까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미투 운동이 마구 떠오르던 어느 날 남자 친구와 관련 이야기를 하다 엄청나게 비뚤어진 나를 보게 되었다. 내가 모든 남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다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쁘다 안 나쁘다는 기준이나 주관을 떠나 나는 그냥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을 인정하고 포기한 듯했다. 그리고 아빠도, 친한 친구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도 그럴 수 있겠지 하고 있었다.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남자들이 그래서 나쁘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저 남자들은 다 그렇지 하는 것이었다. 매우 불쾌한 일을 담담하게 현실이 다 그래 라며 말하고 있었다. 정말 다 그럴까?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모든 남자들이 되어 볼 순 없으니까) 인간도 어차피 세상 모든 생명체와 다름없다. 동물이며 짐승이고 포유류고 잡식이다. 여러 상대와 잘 수 있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딸이든 조카이든 이라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걸 담담하게 말하는 거라면 정말 그게 사람인가? 나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생각 정리가 힘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외삼촌을 떠올렸을 때보다 더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토해냈다.


[너무 화가 나.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그러고도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피해자들은 그 기억을 얼마나 자주 떠올리며 힘들어해야 할까. 앞으로 나에게 더는 외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나에게 그 새끼는 엄마의 동생도 아니고 내 외삼촌도 아니야. 그냥 미친 새끼야. 그 새끼가 결혼을 하든 애를 낳든 죽든 내 상관이 아니야. 그 새끼가 죽어도 난 하나도 안 슬프고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이야. 그 새끼가 나에게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할 징그러운 기억을 남기고 있을 때, 어떤 것도 해주지 못한 사람들은 그 새끼 이름도 꺼내지 마세요. 대체 그딴 새끼를 이해하는 내 가족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 새끼가 애를 낳고 힘들게 살든지 말든지 그런 안타까운 소리를 왜 내 가족들한테 들어야 하지? 정말 징그럽고 끔찍하다 내 인생이. 그 새끼는 열 살짜리 어린 조카의 성기에 손가락까지 넣은 미친놈이야. 그걸 어떻게 잊어 내가.]


분명 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깊은 상처는 또 다른 깊은 상처를 만들어 낸다. 상처의 연속이다. 가족들은 분명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자기합리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을 것이다. 다 잊었을 것이라고 어릴 적 일이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괜찮아 보이니까. 내 가족을 이해한다.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내 가족의 당황스러움과 서투름을 이해한다. 그리고 나의 약함으로 다시 상처를 주어 미안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더 강하고 깊고 넓은 좋은 사람이 되자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런 일로 내가 비뚤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상처를 보고 다시 아팠다. 오래된 상처인데도 볼 때마다 아팠다. 남의 상처를 보고 내 상처를 보고 다시 아팠다. 아마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 고질 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열 살 즈음, 바닥에 압정이 있는지 모르고 밟았다. 작은 발바닥에 작은 압정이 박혔다. 떼어내고 아무 치료도 하지 않았다.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땐 그저 작은 구멍이었기에. 그 발바닥 압정 박혔던 곳이 가끔 걸을 때마다 아리다. 정말 오래전에 다친 상처인데도 매일, 자주 아픈 것이 아니고 갑자기 어느 날 그냥 그곳이 아프다. 딱 그 위치에 아린 통증.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저 걷는다. 아파도 무시하고 걷는 다. 그게 내 최선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 언제 아팠냐는 듯 아무 느낌이 없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또 아플 것이다.


나는 사회에 일어나는 일들에 눈과 귀가 밟은 사람은 아니다. 사실 뉴스도 안 보고 집에 티브이도 없다. 연예인에 관심 없고 드라마도 취미가 없다. 나는 뭐가 옳은지 진실인지 말하고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상처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 것이며, 살면서 절대로 잊힐 수 있는 기억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는 나의 여동생, 누나, 그리고 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이다. 절대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부디 더 큰 상처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미투 운동의 처음 의미와 의의를 마음 깊이 지지한다. 상처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그 일을 부디 더욱더 조심스럽게 다루어 주기를, 또한 나의 가족이 아니어도 타인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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