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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o Sep 22. 2018

뒤에서 걷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대한민국의 여자 사람이라면 누구든 느껴보았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장담한다.

물론, 남자 사람도 그럴 수 있고, 대한민국이 아니어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글은 대한민국의 여자 사람이라면 누구든 경험했을 감정에 대하여 써보고 싶다.


나는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믿는 다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요즘은 페미니스트를 읽는 방식의 차이가 사람마다 너무도 달라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쓰는 것은 페미니스트가 정확한데, 읽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중요한 것은 차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성으로서 성의 다름을 존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다. 여성과 남성은 분명한 다름이 있다. 글 조금 읽었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틀리다'와 '다르다'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 다르다. 다른 두 가지를 두고 비교하거나 채점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어리석다.


나는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었을 때 우리가 극과 극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분명한 차이를 이제는 모두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힘이 더 강하므로 인하여, 여성이 남성에게 위협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물론 위협받지 않는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가려지는 것이 억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늦은 밤, 가로등 몇 없는 길을 걸을 때에 뒤에 있는 사람의 성별이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억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한번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믿던 그 생각에 물음표를 붙이는 시도가 필요하다. 감정을 배제하고 중성의 입장이 되어서 객과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이제는 정말로 필요하다.


늦은 밤 자유로운 길거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삶에 대하여, 아무 말하지 못하고 적응해 버린 것은 여성이다. 예를 들면, 여자들은 헤어질 때에 언제나 서로에게 '조심해서 가'라는 말을 빼먹지 못한다. 혹시나 제대로 집에 도착했다는 답장이 없으면 걱정스러워 전화를 걸고, 늦은 밤 택시를 타면 번호판을 적어 놓으며, 밤 중에 어두운 길을 걷는 데 뒤에 크고 건장한 남성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골목을 꺾는 다면 핸드폰에 112를 눌러놓고 걸음을 서두른다. 이것은 과장된 소설이 아니라, 나와 나의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요즘, 어떻게 하면 현재 대한민국 여성들이 강한 외침들이 되도록이면 친절하게 설명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을지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의 나의 반려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나의 사랑하는 조카(여자, 4살)를 위한 일이기도 하며, 혹 미래 나의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반드시 한쪽의 성별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이 다를 수 있고 그들을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생각을 정리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적이 돼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아주 사소한 다툼에서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립 구조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최근 여성차별을 강하게 외치는 여성들에게서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 듯하다. 아마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러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리라. 나는 그를 이해하지만, 그녀들이 어떤 사연을 지닌 여성인지 알 수 없으니까 섣부른 부정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나의 글 중에 '보고 다시 아프다' 라는 글이 있는데, 내가 격은 성폭행에 가까운 성추행에 대하여 쓴 글이다. 과거에 어떤 상처로 인하여 그녀들이 그러한 격한 분노를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사회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상처를 가진 여성으로서 그녀들에 대한 불편함을 너무 감정적으로 드러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불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러한 상처에 어느 누가 아무리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르며 치료 한들, 지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스스로 상처를 어루만지고 안아줄 수 있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상처에 약이 되지는 않는다. 나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진정으로 우리의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페미니즘을 읽는 방법부터 공부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상처를 설명하는 방법도 공부해야 한다.


내가 읽는 페미니즘은, 차별과 평등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2018년 8월 26일, 강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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