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사랑했던 나,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
나는 건축가이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
처음 건축을 만났을 때 나는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하얀 종이 위에 선을 긋고 빛과 바람을 머릿속으로 설계하고 무게와 균형을 계산하며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어내는 일.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숨 쉬게 했다.
도면을 붙들고 밤을 새우는 일도,
끝없이 수정하고 다시 그리는 일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건축은 나를 완성시켜주는 사랑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품었다.
아이를 서울에서 낳고 나는 여전히 일과 육아를 함께 안고 살아가려 했다.
남편은 지방에 있었고 우리는 주말마다 만나는 삶을 택했다.
처음에는 괜찮을 거라 믿었다.
평일에는 나 혼자 아이를 돌보고 일을 하고 주말이면 가족이 되어 웃을 수 있을 거라고...하지만 아이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알았다.
아이에게는 아빠가 필요했다.
하루 종일 엄마만 보는 아이, 저녁이 되면 유난히 고요해지는 눈빛.
아빠를 기다리는 작은 어깨.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이에게 매일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가족이 함께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내 일을 내려놓았다.
꿈꾸던 삶을 잠시 접고, 남편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 선택이 아이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부서졌다.
처음 지방으로 내려왔던 날, 나는 조용히 울었다.
낯선 골목길, 나를 증명해주던 일도, 나를 가슴 뛰게 하던 공간도 사라진 하루.
나는 단지 아이의 엄마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일은 소중하다.
그 무게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는 하루.
나를 '나'로 불러주는 공간이 없는 삶.
그 안에서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자신을 잃어갔다.
엄마라는 이름은 따뜻했지만, 그 이름 안에 나라는 존재가 서서히 희미해지는 것을 나는 하루하루 느껴야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동시에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조용히 싸워야 했다.
이제 아이는 낮잠을 자지 않는다. 대신, 유치원에 등원한 이후 짧지만 소중한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심리학 책을 읽는다.
오랫동안 내 안에 품어두었던 질문들을 조심스럽게 마주하는 시간.
또, 필라테스 운동을 시작했다.
굳어 있던 몸을 천천히 펴고, 멈춰 있던 숨을 깊게 들이쉬는 연습.
매트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 나는 깨닫는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비록 다시 도면 앞에 앉지는 못해도,
비록 예전처럼 이름을 내걸고 설계하지는 못해도,
내 안의 건축가는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는 엄마이고,
나는 건축가이고,
나는 사람이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설프고, 서툴고, 때로는 벅차지만 나는 둘 다 품고 살아가려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지키는 일.
나를 잃지 않으면서 아이를 사랑하는 일.
그 두 가지를 함께 껴안는 삶을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단단하게 꿈꾼다.
오늘도 나는 아주 작은 시간들을 모아 조용히 나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