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의 궁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던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원래 이름 없는 변방의 가문 중 하나였으나 14세기 복잡한 정치 환경 속에서 어부지리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 황제가 된 이후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 자리를 독점하여 황실의 지위를 누렸다.
이 가문의 근거지는 오늘날 스위스에 위치하고 있는 하비츠 부르크로서 그 지역명에 유래하여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쟁보다는 결혼과 외교전략으로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왕실과 연결하며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그리고 유럽 대륙 전체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여 지배하려고 했지만 그 꿈은 무위로 돌아가고 카를 5세에 와서 그 영토가 에스파니아와 오스트리아로 나누어진다. 이후 프랑스 왕실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 앙뜨와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함으로 합스부르크와 연결되었다.
쉔부른 궁전의 16번에서 18번 방까지 이어지는 이 방들은 풍경화가인 요셉 로자의 이름을 따서 <로자의 방>이라고 부른다. 문 왼쪽의 첫 번째 그림은 로자가 그린 스위스 아르가우에 있는 하비 히츠 부르크로서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발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방에는 황제 프란츠 쉬테판 1세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그는 1745년, 부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치적 수완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대관식을 올렸다. 그는 자연과학과 재정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는데 그의 초상화에서 그의 예술과 역사 그리고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물품 및 수집품들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쉔부른 궁전에서 가장 화려한 대 갤러리가 나온다. 이곳은 황제의 가족들이 무도회나 리셉션, 혹은 성찬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길이가 40미터 이상이고 폭이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이 대 갤러리는 궁정 행사를 치르는 데 아주 적격이었다. 크리스털 거울들과 금박의 석고 세공 장식, 그리고 천정 프레스코들로 이루어진 이 홀은 로코코 시대의 총체적인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천정 프레스코화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를 찬양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림 중앙에 프란츠 쉬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가 옥좌에 앉아 있고 그 주변에는 통치자의 미덕과 세습 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물들이 그려져 있다.
또한 갤러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형 샹들리에는 나무를 깎아 금박을 입힌 것으로 1901년에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각각 70개의 양초들을 꽂아 사용하였다.
황정이 끝난 후 대 갤러리는 연주회장으로 사용되었고, 1961년에는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역사적인 만남이 여기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대 갤러리 바로 옆의 소 갤러리는 황실 가족의 축일이나 생일파티 때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 궁전의 정원과 마리아 테레지아 때 언덕 위에 세웠던 글로리에뜨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소 갤러리의 양쪽에 23과 24번 방인 중국식 별실들이 있다. 이 방들은 오락실과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대유행이었던 중국과 일본 예술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두 별실 안에는 값비싼 중국산 무늬판들과 황금 테두리들이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름 25번 방인 카루 셀, 즉 승마 퍼레이드 방은 두 개의 큰 그림 중 왼쪽 그림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그림에서 승마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귀부인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라하를 탈환한 기념으로 1743 년 호프부르크의 겨울 승마학교에서 개최한 행사였다.
오늘날 <스페인 승마학교>리고 불리는 이 겨울 승마학교에서는 지금도 흰 말들의 묘기를 볼 수 있다. 그림 중앙에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도 리피차너 즉 흰말을 타고 궁정의 귀부인들을 이끌고 있다. 왼쪽 초상화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칼 6세가 화려한 스페인식 코트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26번 방인 궁정 연회홀은 궁전 안의 세례나 결혼식 등 소규모의 연회들이 개최되었다. 이 홀을 장식하고 있는 일련의 그림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요셉과 부르봉 왕가의 공주인 이사벨라 폰 팔마의 결혼 축하연을 보여준다. 여기서 가장 큰 그림은 98대의 마차를 거느린 이사벨라의 신부 행렬로서, 전 유럽에서 참석한 최고 귀족들의 마차에는 그들 가문의 문장들이 뚜렷이 그려져 있다.
특히 연작 회화에 눈에 뜨이는 그림은 여군주의 초상화로 그녀는 레이스 직물로 만든 값비싼 의상을 입고 있다.
쉔부른 궁전 관람은 임 페리얼 투어와 그랜드 투어로 나누어지는데 임페리얼 투어는 여기서 끝난다. 이후 계속 방들을 감상하려면 그랜드 투어 티켓이 필요하다.
그랜드 투어의 첫 번째 방이자 28번 방인 청색 중국 살롱
은 18 세기에 손으로 그린 한지벽지 그림들을 19세기 초에 붙여 장식한 벽으로 유명하다.
이 방은 역사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곳이다. 바로 이 방에서 마지막 황제 칼 1세가 1918 년 11 월 11 일에 국무 포기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이로써 600 년간 지속되던 합스부르크가의 통치에 종지부가 찍혔다.
칼 황제는 하야하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1922년에 35세의 나이로 마데이라 섬에서 죽었다. 반면에 그의 부인 치타는 1989년까지 살았고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비로서 황릉인 카이저그루프트에 묻혔습니다.
29번 방인 뷔에-락-방은 사랑하던 남편 프란츠 쉬테판이 1765년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회상의 방으로 바꾼 곳으로 중국산 검은 래커 판들을 호두나무 벽판 안에 집어넣고 황금 테두리로 장식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쉬테판이 죽은 후 한 번도 검은 미망인 옷을 벗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의 기도서에서 쪽지를 하나 발견했는데, 테레지아는 그 쪽지에 자신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시간 단위까지 정확하게 기록해 두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회상의 방에 걸어 두기 위해 3 개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중앙의 그림은 폼페오 바토니가 그린 <프란츠 쉬테판>이다. 그림 아래에 있는 책상 위에는 계몽사상의 정수 작품 중 하나인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라는 책이 놓여 있다.
계몽주의의 기본이념을 토대로 이 젊은 황제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방의 오른쪽으로 같은 화가가 1769 년에 로마에서 그린 작품인 <요셉 2 세와 그의 동생 레오폴트의 2세>의 초상화도 보인다.
다음 30번, 나폴레옹 방은 프랑스 황제를 상기하게 한다. 그는 1805년과 1809년, 두 번에 걸쳐 비인을 점령하였을 때 예전의 마리아 테레지아 침실이었던 이 방에서 거주하였다.
1810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인 프란츠 2세 황제는 딸 마리 루이제와 나폴레옹을 혼인시킴으로써 두 권력자 사이에 마침내 평화를 가져왔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마리 루이제는 아들과 함께 우선 빈의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 후 나폴레옹의 아들은 유럽국의 요청에 의해 정치적으로 배제되어 비인 궁전에서 할아버지의 보호 하에 외부와 단절된 채 자라야 했다. 콘솔 테이블 위의 종달새는 나폴레옹 아들이 사랑하던 애완동물이었다. 1832년 겨우 21세의 나이로 나폴레옹의 아들은 폐병으로 죽는다. 흉상은 그의 임종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