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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Dec 24. 2020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 박물관 섬

페르가몬 박물관은 베를린의 박물관 섬 안에 위치해 있다. 박물관 섬은 박물관이 밀집되어 있는 섬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베를린을 관통하는 슈프레 강에 있는 섬의 북쪽 지역에 신구 박물관과 국립미술관 그리고 페르가몬 박물관 등이 있다.  알프레트 메셀과 루트비히 호프만에 의해 설계된 페르가몬 박물관은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박물관 내부에는 페르가몬 제단을 비롯하여 밀레토스의 시장 문과 이슈타르 문 등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실제 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은 이슈타르 문이다. 이슈타르 문은 고대 신 바빌론의 성문으로 기원전 575년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왕궁의 동쪽에 지어졌다. 도시를 감싸는 성벽의 입구였던 성문은 매끄러운 푸른색 벽돌로 이루어졌으며 동물과 신들이 조각되어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동물은 오록스로 17세기경 멸종한 소의 일종으로 한반도에서도 서식했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나라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 그곳에서 가장 강한 동물을 사냥하는 의식을 치렀다.신 바빌로니아에서는 진짜 동물을 잡아 죽이는 대신 동물의 모습을 이슈타르 문 안에 새겨 넣은 것으로 그 전통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웅장한 문의 크기로 보아 전체 도시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운영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지배력을 과시하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네부카즈네자로 2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거대한 성을 지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웅장함과 번영에 눈뜨게 하라.


이슈타르 문을 통과하면 밀레토스의 시장 문이 나온다.


기원후 12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에 지어진 밀레토스 시장 문은 높이 16m, 폭이 30m의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로 고대 밀레투스에 있었던 남부 시장의 입구로 사용되었다. 부유한 그리스의 항구도시였던 밀레토스는 현재는 터키에 속하는 지역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크게 부흥한 도시국가였다.  2층 구조로 된 시장 문의 1층은 부드러운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2층은 화려한 코린트 양식으로 장식하여 단조로움을 피하였으며 기둥 사이에 있는 벽에는 황제의 동상과 로마인들이 식민지 국가들과 전쟁하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시장문 앞에는 오르페우스를 묘사한 멋진 모자이크 바닥이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인간을 비롯하여 새와 동물까지 매료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물들이 둘러싸인 곳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종종 묘사되었다. 로마인들은 주로 그리스 신화의 내용으로 집을 정교하게 장식하였는데 이 바닥 역시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페르가몬 제단을 감상하자.  


페르가몬 왕국은 기원전 180년 현재 터키 영토인 베르가마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명이었던 리시마코스의 사망 이후 아탈로스 왕가가 지배하였다. 기원전 164년에 도시국가의 수호신인 제우스에게 바친 페르가몬 신전은 높이 34.4m로 헬리니즘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박물관을 들어서면 페르가몬 신전의 일부를 축소하지 않고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모든 방문자들은 감동한다.



신전 아래층의 벽에는 신화에 나오는 전쟁 장면을 조각해 놓았다.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아테나와 니케가 땅에서 솟아오른 가이아와 싸우는 모습을 담은 부조이다.

페르가몬 박물관을 나와 바로 앞에 보이는 신 박물관으로 이동한다.



고대 이집트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신 박물관은 박물관 섬에서 페르가몬 박물관과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에서 아멘호테프 4세의 아내인 네페르티티의 얼굴 조각상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신왕조, 18 왕조의 파라오 중 가장 혁명적인 파라오는 아멘호테프 4세로 그는 기원전 1353년부터 1335년까지 약 2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는 보수적인 이집트 왕조에서 유일하게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선대 왕이자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 때문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는 투트모세 3세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이루어 낸 성과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영한 이집트를 물려받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제사장과 관료에게 맡긴 채 평생 여자와 술에 빠져 살았다. 그는 정비 외에도 10명가량의 비를 거느렸고 그것도 모자라 3백 명의 미녀들을 항시 대기시켰다고 한다. 당연히 아멘호테프 3세의 시대에 제사장과 관료의 힘은 파라오를 넘가할 정도로 세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물려받은 아멘호테프 4세는 왕권을 회복하고 제사장의 권력을 약하게 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지금까지 다신교였던 이집트의 종교를 태양신 아톤만 섬기는 유일신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아톤 신을 추종하는 의미를 지닌 아크나톤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일신 아톤만이 자신의 왕권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퍼뜨리고 싶어 했으며 나일강 근처 아마르나로 수도까지 옮겨가며 혁명을 꿈꾸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아멘호테프 4세가 일으킨 미술 혁명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그의 시절부터 이집트 미술이 지켜왔던 정면성의 원리 등 전통적인 규칙이 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아멘호테프 4세의 가족을 새긴 부조를 감상하자.



부조의 왼쪽에는 아멘호테프 4세가 앉아 있으며 반대편에는 네페르티티가 앉아 있다. 이들 부부는 자식들을 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조위에 보이는 동그라미는 태양을 묘사한 것으로 정확히 태양신 아톤이 하늘에서 광선을 쏘고 있는 모습이다. 빛의 끝부분을 손처럼 그려 신의 손길이 왕과 그의 가족을 보듬어 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부조에서 보이는 아멘호테프 4세와 네페르티티의 모습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기존의 딱딱한 인체는 없고 몸에 달라붙어 신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옷의 주름이 무척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다는 덤이다. 또한 기존 이집트 신들이 원시 애니미즘에서 아직 못 벗어나 동물의 형상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톤 신은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훨씬 더 현대적이다.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하는 기존 이집트 미술에서 벗어나 파격적이며 부드러운 이 시기의 이집트 미술을 아마르나 양식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신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감상하자.



먼저 깔끔한 형태와 엄숙한 표정의 네페르티티 흉상에서 왕비의 위엄이 느껴진다. 목의 길이는 비현실적으로 길지만 머리에 쓰고 있는 긴 모자와 조화를 이루며 균형감을 보여준다.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을 완성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각상이 완성될 무렵 쿠데타가 일어나서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눈을 완성하는 순간 조각상이 살아날 것 같아서 일부러 완성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한다.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는 이야기이다.


아멘호테프 4세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실패한 혁명의 흔적이 3천 년의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큰 아름다움을 남겼다는 사실에 여행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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