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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Dec 26. 2020

프랑크푸르트 여행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최고 번화한 거리인 자일 거리를 지나면 구시가의 중심지인 뢰머 광장이 나온다. 뢰머광장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끝난 후 축하연이 열렸던 장소로 중세 이래로 600년간 시청사로 사용된 뢰머와 니콜라이 교회 그리고 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으며 광장 중앙에는 정의와 법을 담당하는 유스티티아 여신이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광장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청사를 비롯한 모든 건물들이 하고 있는 삼각형 지붕이다. 심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붕은 눈이 많은 지방에서 겨울 동안 눈의 하중을 견디기 위한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뢰머는 1405년에 상인들로부터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하였으며, 이곳 2층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52인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황제 홀이 있다.

뢰머 광장의 옆에는 230년간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이 있다.


1239년 교황이 성 바르톨로메오의 해골을 성물로 보내면서 성 바오톨로메오에게 헌정된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은 1562년부터 1792년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치루어져 황제들의 성당이라는 의미를 가진 카이저 돔이라고 불린다.  



실내로 들어가면 카이저 돔이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목조 성가대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그리고 마리아 슈라프 제단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특히 96m 높이의 15세기 고딕 양식의 탑에 오르면 마인강을 낀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카이저 돔을 나와 마인강을 건너면 작센하우젠이 나온다.



작센하우젠은 프랑크푸르트의 대표적인 먹자골목으로 소박하고 예스러운 작은 골목 곳곳에 맥줏집과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사과 와인 <아펠바인>을 맛볼 것을 추천한다.

 

작센하우젠에서 마인강변을 따라 여유로운 산책을 하다 보면 오늘의 최종 여행지인 슈테델 미술관이 나온다.  



은행가였던 요한 프리드리히 슈테델에 의해 1815년에 세워진 슈테델 미술관은 14세기부터 르네상스를 지나 현대에 이르는 700년간의 서양미술사를 총망라하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이다. 이곳에서 보티첼리와 렘브란트 그리고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비롯하여 피카소, 자코메티,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거장들의 작품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


미술관을 입장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 <캄파냐에서의 괴테>이다.



1787년 프러시아 궁정의 화가였던 티슈바인은 괴테와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하였으며 당시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작품에서 로마 근교의 평원인 캄파냐를 배경으로 고대의 폐허 사이에 괴테가 비스듬히 앉아 있다. 당시 유행하던 챙 넓은 모자와 크림색의 여행 코트를 착용한 괴테는 먼 곳을 응시한 채 그의 오른발은 현실의 땅을 딛고 있으며 코트로 가려진 비정상적으로 긴 왼쪽 다리는 고전의 세계, 즉 이상향의 세계로 뻗어 있다. 괴테의 지적이고 이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신고전주의 특유의 우아함이 넘친다.  


다음으로 감상할 작품은 보티첼리의 <여인의 초상>이다.  



15세기 피렌체는 한 여인의 등장으로 술렁거렸다. 시모네타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피렌체에 왔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의 아름다움은 모든 남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그녀의 부드럽게 물결치는 금발머리와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상냥한 마음씨에 보티첼리 또한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보티첼리의 짝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나이에 세상을 죽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티첼리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당시 그의 작품에 나오는 비너스는 모두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작품 속 주인공이 바로 그녀이다. 작품에서 보티첼리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과 섬세한 세부묘사 그리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인물 표현이 돋보인다.


15세기 피렌체에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보티첼리는 신중심의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성스러운 신을 그리는 대신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속적이지만 이상적인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플라토닉 러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인 렘브란트의 <삼손과 데릴라>를 감상하자.



작품에서 갑옷을 입은 블레셋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삼손의 모습이 보인다. 삼손의 뒤로 두 명의 병사가 삼손을 뒤에서 잡고 쇠사슬로 묶고 있으며 삼손의 앞에 있는 병사는 칼로 삼손의 눈을 찌르고 있다. 또한 삼손의 앞으로 아랍식 군인 복장을 한 병사가 삼손에게 창을 겨누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작품 위로 밖으로 빠져나가며 삼손 쪽을 뒤돌아 보는 데릴라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녀의 한 손에는 가위를 다른 한 손에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 쥐어져 있다. 성서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이 장면을 렘브란트는 그 특유의 빛을 이용해 어둠과 대비를 이루며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신흥 상공업 국가의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렘브란트는 성공한 화가로  그의 작품을 소유하기 위해 당시 많은 부르주아들이 몇 달씩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유행했던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연극무대에서 나오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한 줄기 빛에 의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부와 명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야경>이라는 단체 초상화를 선보이면서 그를 찾던 고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렘브란트 스스로는 이 작품을 일생의 걸작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두들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시 사람들은 초상화에서 그저 자신의 모습이 그림에서 잘 나오기를 원했는데 집단 초상화인 <야경>에서 어떤 이는 반만 어떤 이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예술성을 몰라주는 그들이 미웠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의 명성과 실력을 질투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가 사랑하던 부인 사스키아가 죽음을 맞이하자 그는 젊은 시절 몸에 배어 있는 소비생활로 파산위기에 처했다. 이후 렘브란트는 죽을 때까지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담긴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죽기 얼마 전 둘째 부인이었던 핸드리케가 죽고 이어서 그의 하나뿐인 아들인 티투스가 전염병으로 죽자 그의 절망감은 극에 달하였으며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가 말년에 그린 초상화를 보면 공허하고 쓸쓸해 보인다. 젊은 시절의 치열한 열정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가고 노년의 주름진 얼굴 위로 초점을 잃은 눈동자만이 깊어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렘브란트의 초상화에서 힘든 삶을 버텨낸 인간의 품격과 자존감이 느껴진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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