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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Jan 09. 2021

하이델베르크 여행

철학자의 길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유럽의 가장 기품 있는 도시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는 네카강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6백 년이 넘은 대학과 고풍스러운 다리 그리고 폐허가 된 고성이 어우러져 여행자의 마음을 오래동안 사로잡았다.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 왔던 이 도시를 괴테는 여덟 번이나 방문하며 시와 그의 대작 <파우스트>를 구상했다. <파우스트> 1권에 나오는 부활절의 산책 장면은 하이델베르크의 자연을 노래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여행은 비스마르크 광장에서 시작한다. 광장에서 구시가 안으로 형성된 하우프트 거리를 걸으면 선제후 박물관과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성 등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선제후 박물관은 17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요한 모라스가 지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처음에는 모라스 궁전으로 이용되었다가 1906년부터 선제후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선제후 박물관 내부에는 주로 15~17세기에 만들어진 회화나 예술작품 그리고 당시 귀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선제후 박물관을 지나면 맞은편에 보이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벨상 수상자를 55명이나 배출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헬무트 전 독일 총리 등을 비롯하여 여러 국가의 정상이 수학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학생감옥이다.



하이델베르크의 학생이 하이델베르크 시민 중 4분의 1을 차지했던 1712년부터 1914년까지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치외 법권의 특혜를 누렸으며 대학 뒤편에 있는 학생 감옥은 치외 법권을 누렸던 학생들이 잘못을 하면 가두던 곳이었다. 학생들이 이곳에 감금되면 1일에서 30일 동안 빵과 물만 지급하였으며 수업 등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당시 구금된 학생들이 감옥 천장이나 벽에 자신의 이상이나 깃발 등을 낙서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나와 하우푸트 거리를 다시 걸으면 하이델베르크 성을 오르는 입구 근처에 있는 예수회 교회를 만난다.  



1759년에 지어진 예수회 교회는 78 미터 높이의 바로크 양식의 첨탑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으로 입장하면 눈부시게 깔끔한 하얀 벽과 중앙의 웅장한 벽화 그리고 황금빛 조각들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교회를 나오면 하이델베르크 성을 오르는 푸니쿨라가 기다린다.



푸니쿨라를 타고 성에 올라 정원에 있는 전망대에 서면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원을 지나면 하이델베르크 성의 입구가 보인다.


13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하이델베르크 성은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된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17세기 구교도와 신교도가 벌인 30년 전쟁으로 파괴되었으나 칼 루드비히가 복구하였다. 하지만 팔츠 계승 전쟁 때 프랑스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당시의 전쟁을 상기하기 위해 지금도 그때 파괴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프리드리히의 관이다. 프리드리히 관 정면에는 프리드리히 4세의 선조들과 바이에른 지역을 통치한 비텔 왕가 출신의 선제후들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을 피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프리드리히의 관 지하에는 독일에서 가장 큰 포도주 통인 <파스>가 있다. <파스>는 집채만 한 와인 통으로 22만 리터를 담을 수 있는데 포도 재배 농가들이 영주에게 포도주를 현물세로 바치면 보관하는 통이었다. 와인 통 맞은편에는 페르키오 조각상이 있다. 페르키오는 1728년부터 술통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이탈리아 난쟁이로 하루 15리터의 포도주를 마셨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포도주를 한 잔 더 할 수 있냐고 물으면 그는 항상 이탈리아어로 Perche no!(물론입니다)라고 답했는데 여기서 그의 이름이 생겨났다. 그는 항상 취해 있어 그를 깨우기 위해서는 비상시에는 종을 흔들어야 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성을 내려와 철학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네바강으로 가면 카를 테오도르 다리가 나온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는 이름처럼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 의해 지어진 다리로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옛날 다리라는 뜻을 가진 알테 브뤼케라고 불려진다. 원래 이 다리는 목조 다리였으나 홍수와 폭설에 자주 망가져서 1788년에 선제후에 의해 석조 다리로 만들어졌으며 2차 세계대전에 파괴되었다가 복원하여 현재 모습을 하고 있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의 입구에는 문이 하나 있다. 이 문은 다리와 함께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를 둘러쌓고 있던 성벽의 일부였다. 문 옆으로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 동상과 아테네 여신상이 보인다. 그런데 이 멋진 동상을 제치고 이것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동상은 원숭이 동상이다.



1979년에 세워진 원숭이 조각상은 둥그런 거울을 들고 있는데 이는 하이델베르크 주민이 하나이며 평등하다는 점을 상징한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전에 하이델베르크의 성 안에 사는 주민과 성 바깥에 사는 주민 간에 반목이 심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원숭이 조각상이 들고 있는 둥그런 양심의 거울을 보여주며 화합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원숭이 조각상은 관광객이 몰리는 명소가 되었다. 거울을 만지면 부귀를 얻게 되고 원숭이의 뻗은 손가락을 만지면 하이델베르크에 다시 오게 되며 원숭이 옆에 있는 조그만 생쥐를 만지면 원하는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이 곳을 찾는 여행자에게 행운을 주는 상징이 되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여행자들을 위해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지만 원숭이 조각상의 역사는 무려 17 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하이델베르크의 그림을 보면 다리 탑 옆에 거울을 든 원숭이 부조가 있었으며 불행히도 원조 조각상은 1689년에 일어난 팔츠 계승 전쟁 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300년 만에 디자인 공모를 통해 현대적인 조각 작품으로 부활하였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를 건너면 하이델베르크 최고의 명소인 철학자의 길을 만날 수 있다. 철학자의 길은 괴테를 비롯하여 헤겔과 베버 그리고 야스퍼스 등 수많은 철학자 또는 사상가가 산책하며 사색에 잠기거나 지인들과 정신적 교류를 나누었던 길로 유명하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뱀 길을 따라 해발 200미터쯤에 위치하는 전망대에 오르면 하이델베르크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며 왜 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왜 지정되었는지 단숨에 알 수 있다.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강줄기와 평행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노라면 누구나 철학자나 시인이 된다. 철학자의 길이라는 명칭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생들의 산책로에서 유래되었다. 옛날에는 대학생과 철학자라는 단어가 동의어였다. 학생들은 누구나 전공을 시작하기 전에 교양인 철학을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의 맞은편에 있는 산책길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둘만의 낭만적인 시간을 갖기에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괴테는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만난 서른 살의 유부녀 마리안네 폰 빌레머와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그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랑하고 사랑받은
나는 이곳에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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