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이네 살구나무
일곱 시 십오 분.
고 3 아들이 등교하고 나서야 비로소 침대에서 일어난다. 일찍 일어났지만 아들에게 잔소리를 안 하기 위해서 일부러 침대에 누워 글을 쓰고 있다. 아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아내의 인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방을 나선다.
제일 먼저 부엌으로 가서 아내가 어제 밤에 해놓은 국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아들의 방으로 간다. 늘 그렇듯이 침대와 잠옷 그리고 책상 위에 어지러워진 컵과 인쇄물을 정리하고 방에 있는 저울에 무의식적으로 몸무게를 잰다. 88kg이다. 187m의 키에 비해 과체중이다.
혼자 아침을 차려 먹고 텅빈 사무실로 가려다가 사무실 뒤에 있는 산을 오른다. 언제나 그렇듯 산은 싱그러우면서 상쾌하다. 1시간 넘게 걷다 보니 지난 일주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코로나로 운영하던 여행사가 힘들어 주위에 있는 여행사와 사무실을 공유하기로 하고 이사를 하는데 이사 비용만 50만 원이 넘었다. 그래서 혼자서 이사를 했다. 사무실 가구는 가구점에 넘기고 가전은 고물상에 넘겼으며 그리고 책과 서류는 박스에 담아서 며칠을 옮겼다.
하지만 난관은 다른 곳에 있었다.
법인인 경우 이사를 하고 2주 안에 사업자 등록증에 주소를 변경해야한다. 변경하지 않으면 영업정지 등 행정처분을 받는다. 법인 주소지를 이전하는데 법인 인감과 등기부 등본은 물론 회사 정관과 이사회 결의서 등 복잡한 서류가 필요하다. 게다가 법무사 비용만 60만원이 넘는다.
이미 6개월 전에 이사를 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법무사를 통하지 않고 일일이 내손으로 서류를 챙긴다. 인터넷 등기소에서 이전 등록세 13만 원을 내고 관련 서류를 다운로드 받아야 하는데 사전에 필요한 절차가 많다. 가장 먼저 법인 인증서를 만드는 일부터 만만치가 않다. 거의 반나절이라는 시간 동안 인터넷과 사투를 벌여 서류를 챙겼다.
다음날 준비한 서류를 가지고 법원 등기소에 도착하니 엄청난 사람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법무사에서 온 분들은 창구로 직행해서 서류를 내고 바로 간다.
하지만 사업이 힘들어서 올해만 벌써 2번째 이사를 해야 했던 사장은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긴 기다림 끝에 접수대에 도착하니 나이 드신 담당자가 면박을 주며 글자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수정해서 다시 오란다. 수정하고 기다려서 다시 접수대에 가니 또다시 수정해서 오라고 한다.
코로나로 사업이 힘들어 작은 사무실로 이사를 하면서 사업자 등록증에 주소 몇 자 바꾸는데 이런 모욕과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당황했다. 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접수를 할 수 있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산을 내려오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병든 아버지가 마치 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욕을 하고 고함을 치신다고 한다. 집으로 가니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가 심한 아버지를 모시고 동네 한 바퀴를 돌자고 하신다.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힘겹게 휠체어로 옮겨서 밖으로 나왔다. 신호등을 건너 아버지가 자주 다니셨던 목욕탕과 음식점을 지난다. 매일 지나다니는 동네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린다.
아버지가 넘어져서 고관절 수술을 했던 옛날 집 계단과 주차장을 지나 골목을 지나는데 눈에 비치는 풍경 모두가 경이롭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아버지의 눈으로 보는 동네 풍경은 세상 어떤 여행지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다.
동네 병원에 들러 간단한 진찰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침대에 눕히자 지난 시절 함께 자원봉사를 했던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을 함께 하자는 말씀이다.
형님을 만나 맛있는 음식에 시원한 맥주를 2잔 마시자 형님이 속내를 털어놓으신다.
이제 내발로 걸으며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는 나이가 10년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그전에 내 삶을 조금이라도 가치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니 자원봉사밖에 없다. 힘 닫는데 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
형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톨스토이의 소설이 생각났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을 만족시킬만한 진리를 찾아 세상을 떠돌지만 결국 진리를 찾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온 고향 마을에서 할머니가 된 어린 시절의 친구가 어려운 살림에 어린 손자들을 돌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찾던 삶의 진리가 바로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형님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혔던 정완용 님의 시가 떠오른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 올라
대궐보다 동그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