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여행

배신

용서와 사랑

by 손봉기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성당을 방문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최소 2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언젠가 다빈치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서 이 위대한 작품 앞에 내가 서 있다는 벅찬 감동과 함께 작품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과 신비로운 톤에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이 흘러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브레라 미술관을 방문해서 렘브란트의 <최후의 만찬>을 보았을 때는 감동보다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


렘브란트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중심에 후광을 받고 있지만 가장 앞자리에 예수를 배신한 유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그는 약간 겁먹은 얼굴로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며 당신도 누군가에게 배신자이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모습이다.


며칠 전 길을 가는데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용건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르다가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하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선배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는데 선배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동 중이라 다음에 시간 날 때 보자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여기서 선배는 후배와 대학에서 만나 20년 이상 친하게 지내다가 최근 회사 일로 인해 오해와 미움이 쌓여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말한다.


그는 나와도 관계가 좋지 않다.


후배는 있는 용기를 모두 내어서 전화를 했는데 상대는 무심하게 전화를 받고 끊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한참을 있다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가 복받친 감정으로 울고 있었다. 나는 잘했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어 계속 전화기를 들고만 있었다.


어제는 선배가 찾아왔다. 선배는 내게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마음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한 제자가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몸과 피와 같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마지막 만찬을 가진다.


만찬이 무르익을 무렵 너희 중에 나를 배신한 자기 있다고 말씀하신 후 가장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가리키며 베드로 역시 첫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배신할 것이라 예언하셨다.


만찬이 끝나고 예수의 12 제자 중 한 명인 유다의 밀고로 로마 병사들이 예수를 체포하자 자신마저 잡혀갈 것을 두려워 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부인하고 침묵한 가운데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서 가장 무거운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다.


래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다빈치는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다면 렘브란트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 역시 예수님을 비롯하여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나에게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한 선배는 학창 시절 나를 감옥에 보낸 분이다. 선배와 함께 일하다가 그분의 이야기에 감동받아서 앞장서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다녀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선배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분이 세상 처음으로 나에게 자존감을 심어 준 분이며 지금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은 나에게 벅차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배신자로 남아 있으며 예수님만큼의 인품도 시야의 폭도 못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를 넘어서서 유럽에 다시 갈 기회가 생겨 <최후의 만찬> 앞에 다시 서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기에 오늘 하루도 우울하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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