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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퐁피두센터 5층

by 손봉기


에펠탑의 신랑 신부


이 작품은 샤갈이 장 콕토의 시에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작품속에서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염소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축하 음악을 들으며, 수탉을 타고 에덴동산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그들 옆으로 그들이 던진 부케를 받은 친구는 천사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으며 파리의 자유로운 햇빛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동물과 인간 그리고 사물이 이웃처럼 모두 어우러져 허공에 뜬 상태로 진행되는 결혼식은 현실의 고된 삶을 잠시 잊고 행복 속에 머문 순간처럼 보인다.


그림 속 신랑과 신부는 샤갈 본인과 사랑하는 아내 벨라이다. 샤갈은 오직 벨라를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고 행동하고 그림을 그려왔다고 고백했을 만큼 아내를 사랑했다.


러시아 농촌에서 태어난 샤갈은 유대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성인이 되자 본격적인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왔다. 샤갈이 파리에 왔을 때는 야수파와 입체파가 파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영향을 받으며 자신이 세계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벨라와 결혼하였다. 당시 벨라는 러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부자인 부모를 두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명품 교육을 받았으며 18살의 나이에 세계적 명문인 모스크바대학에 들어갔을 만큼 똑똑했다. 그야말로 풍부한 교양과 지성을 갖춘 매력 넘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샤갈이 파리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6년을 기다렸으며 샤갈이 고국에 돌아온 직후 결혼했다. 샤갈에게 벨라와의 사랑은 그의 초기 작품들을 빛내는 소재였으며 예술의 모티브였다.


샤갈의 작품 중 그녀와 함께 고향 하늘을 날아다니는 작품들이 유독 많은데 이는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는 순수한 영혼의 노래와도 같다. 1944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벨라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사망한다. 아내를 잃은 샤갈은 깊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였다. 이후 재혼한 샤걀은 니스에서 99살까지 살았다.


5층 26번방으로 이동하여 초현실주의 또 다른 화가인 호안 미로의 작품을 감상하자.


전통적인 블루 1,2,3


작품의 제목인 블루는 우리말로 파랑이지만 그렇게 제목을 붙이면 왠지 작품이 담고 있는 미묘한 정서적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히 화집에서 이 작품을 본다면 블루가 지닌 푸른 빛의 참모습을 느끼기에는 많은 한계가 따른다.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앞에 서야만 작품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커다란 화폭에 보이는 블루는 푸른 색 물감을 그냥 벽칠하듯이 메운 것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부드러운 붓질의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서 보송보송한 솜털처럼 포근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그 솜털 같은 붓자국의 표정이 다양하여 하나의 색조이지만 그 짙고 옅음과 다양한 색채의 자태들이 섬세하게 숨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운 기운을 머금은 한 점 빨간색이 푸른색이 지닌 찬기운에 훈기를 더한다. 또한 한 점의 검은색은 솜털같은 푸른색 화면에 무게를 더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균형을 이루어 내고 있다. 여기에 화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유유하게 뻗어 나가는 가느다란 한줄기의 선이 미세한 생동감을 준다.


미로는 그의 나이 68세 때인 1961년에 생애의 기념비적인 <블루> 연작 3점을 만들었다. 당시 그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마요르카섬에서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


그는 이 작품에 착수하기전 5년간은 주로 도자기와 석판화 그리고 동판화에만 몰두하며 그림 그리기의 활동을 일체 하지않았다. 그는 그 기간동안 기존의 형상들과 회화 기법들을 미련없이 청산하고 순수한 추상으로 돌아가 이 작품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마치 구도자가 수행을 하듯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는 정신적인 해탈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호흡을 조절하고 숨을 내쉬신 후 들이 마시고 또다시 내쉬는 등 종교적인 의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무아와 무념의 상태에서 푸른 우주적인 공간을 창출하였다. 그가 창조한 세상의 무한성은 우리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하며 무한한 우주속으로 데려간다. 호안 미로는 이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3천년 후에 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회화의 해방 뿐 아니라
인간정신의 해방을 도왔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5층 번 38방으로 이동하여 추상 표현주의 화가인 잭슨플록의 작품을 감상한다.


추상주의 화가인 칸딘스키가 음악을 대상으로 추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몬드리안은 뉴욕을 대상으로 추상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이처럼 추상주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대상이 있다. 하지만 추상표현주의는 무엇인가 연상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순수한 추상 이미지를 만드는 화파를 말한다.



넘버 26A


거대한 캔버스에 붓자국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플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평면의 상태에서 캔버스 위를 걷거나 한 복판에서 서 있는 상태에서 검은 페인트를 떨어 뜨리고 붓거나 튀기면서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런 식의 행동 역시 작업의 일부였다.


그러나 난장판이 된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일정한 규칙성과 패턴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플록은 수많은 시간동안 페인트 뿌리기를 시도하며 페인트가 바닥에 닿는 흐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고 한다. 결국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은 그의 독특한 예술표현에서 격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독자적 미술이 없었던 미국은 미술시장을 소비하는 세계 최대의 시장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예술은 없었다. 그래서 미국예술계는 미국만의 미술을 만들어낼 화가를 찾았다. 그렇게 찾은 화가가 바로 잭슨 플록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 서부 출신으로 미국이 지향하는 강한 남성의 이미지로 대형 캔버스를 바닥에 깔아 놓고 붓으로 물감을 뿌리거나 거친 붓질로 작품을 완성했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작품이 스스로 완성되게 하였다. 이후 자동기술법에 의한 그의 작품을 액션페인팅이라고 불렀다.


화가의 열정적인 감정을 담은 액션페인팅은 결과물보다는 제작과정의 행위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저명한 미국 비평가인 로젠버그는 이것이야 말로 미국 미술이라며 그를 띄웠다. 그리고 미국 화단은 CIA까지 동원하며 잭슨 플록의 유럽 전시회를 후원하였다. 유럽 전시회 후 세계적인 스타가 된 잭슨플록은 알코올 중독과 자동차 사고로 마흔 네 살에 요절하면서 전설적인 작가가 되었다.


39번방으로 이동하여 추상표현주의 또 다른 화가인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자.


검정. 빨강위에 흑색 너머 빨강


1949년 무렵 로스코의 그림에서는 형태가 사라졌다.

그가 그림에 담고 싶은 것은 인간 유한함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숭고함과 무한함이었다. 무한을 담아내기 위해 유한한 형태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에서 커다란 두개의 사각형이 보이지만 그는 사각형을 그린 것이 아니다. 사각의 캔버스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무형의 형태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사각형이 형태로 인식되지 않도록 테두리 부분들을 스펀지로 부드럽게 뭉개 버렸다.



결국 황홀한 색채만이 캔버스에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스코는 자신을 단순한 색채화가로 규정짓는 것도 거부했다.


빛을 가장 정신적으로 이해했던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빛이 인물들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는 색이 캔버스 밖으로 분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유화라는 물질적 속성 때문에 빛은 색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색채가 갖는 정서적 효과를 종교적 숭고함의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내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내가 그 작품을 그리면서 느꼈던
종교적인 경험과 동일한 체험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체험 같은 것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관람자가 빠져들 수 있도록 큰 그림을 그렸으며 작품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도록 45c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할 것을 요구했다.


5층 40번방으로 이동하여 팝아트의 거장인 엔디 워홀의 작품을 감상하자.


열 개의 리즈 테일러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은 일반인들이 감상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대중들은 작가가 무엇을 그린 것인지 또한 작품의 내용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별한 사람들만 이들의 작품을 이해하고 즐겼다.


그래서 추상 표현주의를 반대하며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를 팝아트라고 한다.

1950년대에 시작한 팝아트는 미국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공산품이 넘치는 대량 소비시대로 접어들었고 TV의 보급으로 대중문화가 활성화되었다. 팝아트는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여 만화나 유명 연예인 등 대중적 소재를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회화작품을 선보였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상업 미술을 도입한 엔디 워홀이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는 1932년에 태어난 영화배우로 아역부터 시작해서 성인시절까지 원숙한 연기력과 관능적인 외모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특히 엘리자베스의 보라빛 눈동자는 그녀를 상징하는 특색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2회 수상했으며, 할리우드 황금기의 가장 위대한 영화스타로 손꼽혔다. 또한 그녀는 지병과 8번의 결혼 생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십년 동안 사회 구조사업을 하였다. 특히 후천면역결핍증후군(AIDS) 홍보와 연구와 치료를 지원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2011년 그녀가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추모하자 앤디 워홀은 이 작품을 그렸다.


그는 유명인의 초상을 작품으로 남기면서 유명세에 집착하며 성공을 숭배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그는 마케팅의 천재였다.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유명스타를 그리면 유명인사들을 추모하는 대중과 미디어에 의해 저절로 자신의 작품이 알려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알려진 그의 작품은 날개 달린 듯 팔려 나갔다.

앤디워홀은 마케팅뿐 만 아니라 자신을 브랜드화 하는데에도 뛰어났다. 보통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 뒤에 숨는다. 그런데 앤디워홀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팝스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대중매체에 자주 출연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알렸다. 이후 그가 만든 작품이라면 대중들은 무조건 믿고 구입하였다. 그가 벌어들인 수익만 당시 6조원이었다.

팝아트로 성공한 앤디워홀의 비결은 그의 작품 제작 방식에도 있다.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인쇄와 같은 기법으로 단 시간내에 수십장을 찍어 낼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미술 작품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소수의 사람들 만이 즐기는 것으로 가격은 비쌌다. 하지만 앤디워홀은 평범한 대중들이 예술품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전단지같이 작품을 대량생산하여 누구나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며 대량생산된 그의 작품은 소수를 위한 고급예술에서 대중을 위한 대중예술을 창조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허물은 그는 그의 작품을 만드는 작업장을 팩토리라고 불렀으며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 역시 노동자라고 불렀다.

새로운 시대에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소재가 예술 작품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산업시대 이전의 작품들이 성경과 신화 그리고 자연을 주제로 삼았다면 미디어가 발달한 대량소비 시대에는 공산품과 유명인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


앤디워홀은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등 대량 소비상품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또 다른 미국 팝아티스트 화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대중 만화를 예술 분야에 도입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울고 있는 여인>을 보면 진실한 아픔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의 여인의 슬픔은 하나의 만화 속 장면일 뿐이다.


대중 매체와 대량 소비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역사적 비극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 생산하고 소비한 후 폐기한다. 대중적인 팝 아트는 진보적인 미술이 주었던 사회 비판적인 기능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팝아트는 스스로 대중매체와 소비문화가 되어 감정없이 쿨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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