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리산의 화엄사로 가는 버스는 평일이라 한적했다. 차창밖으로 지나는 가을 들판과 푸른 하늘은 외로운 여행자의 마음을 달래준다.
구례에서 섬진강으로 버스가 진입하는데 섬진강 위로 파란 하늘이 엄청난 흰구름과 함께 싱그러움을 시위하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서만 가능한 자연의 웅장한 자태였다. 당장이라도 차를 세우고 내려서 섬진강가에 앉아 그 정취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태운 버스는 무심히 목적지인 화엄사를 향해 달려갔다.
화엄사에 도착해서 이전에 자주 갔던 화엄 식당으로 갔다. 친절한 주인아주머니는 가족같이 반기신다. 남도 백반을 시키니 지리산 나물을 비롯해 구수하고 매콤한 된장찌개를 포함하여 반찬이 무려 15첩이다. 나는 좋아하는 더덕주를 시켜 여유 있게 식사를 즐겼다.
식사 후 너무 늦은 시간이라 식당 2층에 있는 숙소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숙소는 원룸형으로 넓고 깨끗했다. 간단히 씻고 화엄사 입구로 산책을 나오니 칠흑 같은 어둠으로 30분도 안되어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새벽 1시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자리가 낯설기도 하고 마음이 심란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숙소를 나와 슈퍼에 들러 소주와 과자를 싸서 방갈로에 앉아 술을 마셨다. 늦은 시간이라 숙소 주위의 모든 음식점과 술집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주위는 지리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고요한 산자락의 풍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침 내리던 부슬비가 심란한 여행자의 마음을 쓸어내렸다. 한참을 앉아 있으니 취기와 피로가 몰려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민박집을 나와 가까운 식당에 들러 콩나물 해장국을 먹었다. 전라도 콩나물 해장국은 깨와 갖은양념이 들어있어 맑지 않고 걸쭉했다. 속을 든든히 채운 나는 5km 정도 되는 천은사까지 도보여행을 하기로 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지난밤 내린 보슬비가 걷힌 날씨는 도보여행 하기에 최고의 조건을 제공했다. 아침 안개로 살며시 자태를 가린 지리산은 경이로움이 넘치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 곳곳에는 맑은 저수지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아침 축제를 열고 있었다.
도보여행은 자동차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자동차 여행처럼 휙휙 지나가는 지리산의 풍경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면서 한 발, 한 발로 전해지는 지리산의 웅장한 풍경이 바늘로 피부를 콕콕 찍 듯 선명하게 온 몸을 자극한다.
어느새 비가 잔잔이 내리는 천은사에 도착했다.
한 바퀴 절을 구경하고 절 앞에 있은 있는 찻집에 들렀다. 문이 잠겨있어 가려는데 저쪽 밭에서 일하시던 주인이 와서 문을 열어주신다.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에 있는 자리에 앉으니 넓은 저수지 가 눈 앞에 들어온다. 그리고 저수지 안으로 앞 산이 그대로 빠져 있고 그 위로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다.
주문한 녹차를 갖다 주고 주인은 묻지도 않고 비발디의 <사계>를 틀어놓고 밭일을 하러 가셨다. 우아한 선율에 따라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자 가을과 겨울이 왔다.
음악이 끝나자 마침 가게에 들른 주인이 역시 묻지도 않고 <사계>를 틀어놓고 다시 밭일을 가셨다. 다시 선율에 따라 봄이 오자 천은사 스님이 한 분 내려오셔서 테라스 저쪽 건너에서 같이 듣고 있다가 가을이 되자 가셨다.
그렇게 갑자기 혼자가 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미친놈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울면서 그 짧은 순간, 나를 괴롭히는 나를 보았다. 보다 많은 돈과 가족의 안위 그리고 회사를 위해 나를 몰아세우는 나와 마주했다. 마주한 나는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그래서 소리 내어 울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시원해졌다.
여행의 축복을 받는 순간이었다. 여행을 하는 모든 순간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로또 당첨처럼 한 번씩 여행이 주는 축복을 맞는 순간이 있다
몇 년 전 대학 선배가 여행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선배인데 여러 가지 힘든 일이 겹쳐 여행을 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선배에게 어울리는 여행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 다녀온 선배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그런데 선배는 들뜬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를 주셨다. 특히 로마 카타콤이 좋았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로마 카타콤에서 지하무덤을 지나는 게
갑자기 눈물이 나서 엉엉 울었는데
그 순간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의 이야기도 선배와 비슷했다. 그녀는 출장을 받아 혼자서 유럽을 갔는데 여행 초반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힘들고 외로웠다고 한다. 그때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들렀는데 그곳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여행의 축복을 받는 순간이다.
여행의 축복을 받는 순간 우리는 일상에서 숨죽였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안아주고 사랑을 하게 된다. 결국 여행을 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서이다.
여행은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보듬어주며 사랑하는 것이다.